2012/03/05 19:19



소설을 읽고 기사를 고민하다
 

팟캐스트 <김영하의 책읽는 시간>으로 친숙한 작가 김영하가 새 장편을 냈다. 지난 해 초 김영하가 시나리오 작가 최고은씨의 죽음과 관련된 논쟁으로 트위터를 그만두면서부터 나는 오히려 이 작가에 새삼 관심을 갖게 됐다. 팟캐스트에서 그가 소개한 책을 하나 둘씩 사 모으고, 그가 직접 쓴 소설을 하나 둘씩 읽어가면서 다소 건조하고 무심한 문체와 치밀한 취재, 그리고 무엇보다 사회에 대한 호기심을 꾸준히 유지하며 나름의 소설세계를 확고하게 넓혀가고 있는 그에게 무언의 지지를 보내게 됐다. 아내가 <빛의 제국>을 읽는 사이에 신작에 대한 정보를 보고, 예약구매로 손에 넣어서 지난 주말에 읽었다. 제목은 <너의 목소리가 들려>.

책을 만지작거리면서 펼치지는 않고 있다가, 중앙일보 토요일자에 실린 신간 소개와 작가의 인터뷰 기사(클릭)를 먼저 읽고 말았다. 대개 책 대신 소개 기사를 먼저 읽고 나면 독서 자체는 '망쳤다'는 생각으로 끝나기가 쉬운데, 막상 책을 다 읽은 뒤에도 그런 생각은 들지 않았다. 작가가 설명하는 자신의 소설과, 내가 읽은 소설이 사뭇 다른 느낌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노 오펜스.

먼저 신간 소개 기사를 인용한다. 대강의 내용은 이걸로 파악할 수 있다. 

주인공 제이는 탄생과 동시에 버려진 고아다. 길고양이마냥 험난한 노숙 생활을 하며, 사회로부터 버림 받은 또래들과 어울린다. 스스로 고아이기를 택한 동규는 제이와 운명을 결탁한 인물이다. 한때 함구증(緘口症)을 앓았는데, 제이는 그런 동규의 속내를 읽어냈다. 훗날 목소리를 회복한 동규는 제이의 길바닥 인생에 합류한다. 제이는 폭력적인 사회에 폭력으로 맞선다. 동규를 비롯한 고아들의 우두머리가 된다. 그들이 잃어버린 사회적 목소리를 대신 외치고 싶었던 게다.

 

다음은 기자의 e메일 질문에 대한 작가의 답변이다. 질문은 굵은 글씨.

-고아가 주인공으로 자주 등장한다.
"내가 가장 사랑했던 주인공들이 대부분 고아다. 『검은 꽃』의 이정, 『퀴즈쇼』의 민수가 그랬다. 『빛의 제국』의 기영 역시 낯선 땅에서 스스로 습득한 규칙과 정보에 따라 살아간다는 점에서 다르지 않다."

-정신적 고아들에 대한 관심인가.
"작가와 작품의 관계는 산책을 나간 개와 주인과 비슷하다. 때로는 개(작품)가, 때로는 주인(작가)이 앞선다. 정신적 고아들이 등장하는 소설들은 내가 의식하지 못한 가운데 나를 끌고 여기까지 왔다."

-어떻게 구상한 소설인가.
"5년 전쯤 90년대에 태어나 2000년대에 생을 마감한 한 소년의 이미지가 떠올랐다. 정신의 사각지대에 있는 소년과 그가 보냈을 시간에 대해 생각하게 됐다. 그리고 취재에 나서자 실제로 그런 소년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내가 주목한 것은 작가의 '성실함'이랄까, '직업정신'이랄까, 그런 거다. e메일 답변에서 작가가 "취재에 나서자 실제로 그런 소년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고 언급한 부분이, 실은 소설의 전부다. 소설의 장면 장면이 신문 사회면의 기사에서 한 번쯤은 다뤄졌을 만한 내용이고, 작가는 그 사건과 사건을 주인공들의 이야기로 엮어낸다. 사건 사이의 공백은 작가의 상상으로 메워진다. 상상이 어떤 질감을 가졌는지, 또 어떤 결과를 이끌어내는지는 읽는 사람의 몫. 좀 억지스러운 부분이 없다고는 못하겠지만, 이미 이런 사건들을 추수때 볏짚가리 모아 잡듯 움켜쥐고 소설을 이끌어나간 작가에게 불만을 말하고 싶지는 않다. 

자, 한 번 보자.

1. 어딘가의 공용 화장실에서 기르지도 못할 아이를 낳은 미성년자
2. IMF 이후 마약의 나락으로 떨어져버린 소시민
3. 방화인지 실화일지 모를 지방 농장의 화재와 비극적인 결말
4. 신촌과 대학로, 서울역에서 먹고 사는 가출 청소년
5. 장애 수급자를 인질로 잡아 지원금으로 먹고사는 불량 가족
6. 성을 파는 가출 청소년들, 여자아이들을 사는 중년 남자들
7. 매년 3.1절과 광복절 새벽을 장식하는 폭주족들의 광란의 질주


우리 모두 이미 알고 있었던 것들이 아닌가.

김영하는 그 '모두가 알고 있는 것'을 꼼꼼하게 그러모아, 씨줄과 날줄로 엮어서 스토리를 짜고 거기에 자신의 색을 입혔다. 그래서인지 김영하의 이번 소설은 최근 몇몇 언론이 시도하고 있는 '내러티브 저널리즘'의 확장 증보판으로 읽힌다. 나쁘다는 게 아니다. 오히려 영리하다. 기자들이 놓치고 있는 것을 붙잡아 앞뒤로 늘리고, 위아래로 펼친 것이다. 그리고 그걸 떠받치기 위해 '허구'라는 (역설적이지만) 탄탄한 심지를 박아 넣었다. 이건, 매일 스쳐가는 사회면 구석의 기사들에 집중하고, 이를 단초로 '취재'를 통해 스토리를 짜는 '작가'의 '집요함'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기자도 물론 '집요함'이라면 당당히 명함을 내밀(어야 하)지만, '파헤침' 뒤에 필요한 '통찰'은 작가에 미치지 못한다. 

안그래도 소설에 잠깐 기자 얘기가 나온다. 기자 '집단'에 관한 내용이다. 

언론사의 취재차량들은 보이지 않았다. 그들은 언제나 대폭주가 끝난 다음에나 법석을 떨었다. 매년 똑같은 일이 벌어지는 줄 알면서도 언론사들은 취재인원을 배치하지 않았다. 다음 날 아침, 경찰청에 나간 출입기자들이 경찰로부터 검거 인원과 단속 상황을 브리핑받고 단신으로 처리하면 그만이었다. 광복절 전야에 몇몇 신참기자들이 출입 경찰서 '형님'들의 긴장된 움직임을 데스크에 보고했지만 취재명령은 떨어지지 않았다. 대학생과 시민단체는 쉰 명만 모여도 카메라들이 몰려들었다. 그들은 한 자리에 고정돼 있는데다가 이슈도 중산층이 관심을 가질 법한 것들이었다. 그들은 '그림'이 잘 나오도록 피켓과 촛불을 들고 한 자리에 앉아 구호를 외쳤다. 그러나 폭주족들은 따라잡기도 어려웠을 뿐 아니라 그림도 안됐다. (p.214-215)

 
틀린 말 하나 없다. 

그러고보면 기자들이 가장 듣기 싫어하는 말 가운데 하나는, 자신의 기사를 '소설 썼네'라고 평가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명제를 이제 바꿔야 할 때가 된 것 같다. '기사를 써야 하니까 그렇지, 나도 소설 쓰라고 하면 얼마든지 쓸 수 있다'고 공허하게 외치는 이른바 '내러티브 저널리즘' 시대의 기자들-물론 나를 포함해서-에게, 이 소설이 어떻게 다가갈지 궁금하다. 소설은 기사를 향해 이렇게 공격적으로 다가오는데, 기사는 어디로 가야 하는가. 뭐, 하루 이틀 얘기는 아니지만.










**신간 소개 기사로는 경향신문의 이 기사가 무난하다. 제목은 좀 아닌 것 같지만.
[경향신문] "인간의 괴물성이라는 것이 분출하는 10대들 얘기" (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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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jyoo
2012/03/05 12:15


아침에 J일보를 훑어보다가 눈길이 머문 기사. 27면에 실린 이 기사의 제목은 "72억원짜리 요요마 첼로…장구치듯 두드린 김동원"이다. (링크) 원광디지털대학 전통예술학과 김동원 교수가 참가하고 있는 '실크로드 앙상블'이 오는 12일 서울 예술의전당 무대에 오른다는 기사. 

내용보다는 저 단어 '꾕가리'를 보고 뭔가 이상해서 한참을 봤다. 아무래도 어색했다. 네이버에서 '꾕가리'를 찾아봤는데, 이런 결과.


'꾕가리'에 대한 검색결과가 없습니다.

  • 단어의 철자가 정확한지 확인해 보세요.
  • 한글을 영어로 혹은 영어를 한글로 입력했는지 확인해 보세요.
  • 검색어의 단어 수를 줄이거나, 보다 일반적인 검색어로 다시 검색해 보세요.
  • 두 단어 이상의 검색어인 경우, 띄어쓰기를 확인해 보세요. 네이버랩 자동 띄어쓰기


'꾕가리'는 '꽹과리'의 잘못된 표현이다. 네이버 국어사전에는 이렇게 돼 있다. 
링크는  http://krdic.naver.com/detail.nhn?docid=6408500#FGN1054 

꽹과리

명사

<음악> 풍물놀이와 무악 따위에 사용하는 타악기의 하나놋쇠로 만들어 채로 쳐서소리를 내는 악기로, 보다 작으며 주로 풍물놀이에서 상쇠가 치고 과 함께 굿에도 쓴다[비슷한 말] 동고6()ㆍ소금2()ㆍ4().

관련 규범 해설

‘꽹과리’의 의미로 ‘꽝쇠’를 쓰는 경우가 있으나 ‘꽹과리’만 표준어로 삼고, ‘꽝쇠’는 버린다.

관련조항 : 한글 맞춤법 4장 3절 25항
 

김 교수가 '꽹과리'라고 말한 걸 기자가 '꾕가리'로 잘못 썼을 확률이 높다. 그러면서 기자 본인의 질문인 '장구'는 표준어로, 김 교수의 답변인 '장고'는 틀린 표현으로 썼다. 김 교수는 전문가인 '주제'에 '장구'와 '꽹과리'를 모두 잘못 말한 얼치기 전통예술가가 되어 버린 셈이다. 김 교수의 서면 답변을 그대로 기사화했다면 모르겠지만,  기사 첫머리에 '공연을 앞둔 김 교수를 만났다'고 되어 있으니, 서면 인터뷰는 아닐 것이다. 대체 뭘 어쩌라는 말인가. 김 교수는 해당 기자에게 기사 정정을 요구하시라.


쓰는 김에 하나 더.

3월 3일 토요일판 J일보에 난 기사다. 



기사 제목은 "브로드웨이에서 주목받는 한국계 연극인 제니퍼 림"이다. (링크) 제니퍼 림의 가족적 배경을 설명하면서 '국물 있사옵니다'의 작가 이근삼 선생이 그녀의 '외삼촌 할아버지'라고 소개했다. 외삼촌 할아버지? 제니퍼 림의 외삼촌의 할아버지(외증조부)인가, 할아버지가 된 외삼촌인가? 제니퍼 림의 아버지의 외삼촌인가? 할아버지의 외삼촌인가? 어떤 가족에서는 흔히 쓰는 말일지도 모르겠지만, 얼핏 봐서는 촌수를 도무지 짐작할 수 없는 표현이다. 

역시 네이버에서 검색. 결과는 클릭

설명을 보면 보통 '아버지의 외삼촌', 즉 내 위치에서는 친할머니의 남자 형제를 '외삼촌 할아버지'라고 하나 보다. 그러나 이는 정식 명칭이 아니고, 위에서 보듯 듣는 사람에게 혼란을 줄 수 있다. 

표준대국어사전에 따르면 아버지의 외가는 진외가(陳外家)라고 하고, 위에서 '외삼촌 할아버지'라고 표현한 어른은 '진외종조부', 혹은 '진외할아버지'라고 해야 한다. 물론 '외삼촌 할아버지'가 '진외종조부'나 '진외할아버지'보다는 친숙하게 들리지만, 엄밀히 말해 틀린 표현이다. 

기사 바이라인을 보니 해당 기사는 뉴욕 현지에서 프리랜서 기자가 썼다. 아무리 그렇다고는 해도, J일보는 데스크 안 보는가.  

찾아보니 이런 도표도 있긴 하다.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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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jyoo
2012/02/29 21:23

(사진은 아무거나)

원본 링크는  http://lynceus.seesaa.net/article/7647931.html 

페이지를 괴발개발 번역했습니다.
능력자분들 계시면 틀린 부분 지적해주세요.




무라카미 하루키가 재즈 찻집-위치는 아마도 고쿠분지-를 운영하던 시절에 지금은 절판된 잡지 'JAZZLAND'에 유니크한 문장을 기고했다. 당시에도 뛰어난 문장력을 지니고 있었구나. 



[재즈 찻집의 마스터가 되기 위한 18문 18답]
[JAZZLAND] 쇼와 50년 (1975) 8월 1일호

Q1. 재즈 찻집을 시작하고 싶은데요, 콕 찍어서 가장 요구되는 자질은 뭘까요?
-A.  두려움을 모르는 행동력입니다. 

Q2. 그러면 가장 불필요한 건요?
-A. 지성(知性)입니다. 

Q3. 현재 대학에 재학중인데요,  일단 졸업은 하는 게 나을까요?
-A. 경험에서 말씀드리면, 졸업증서의 껍데기는 메뉴로 쓰기에 딱 좋습니다. 

Q4. 좋아하는 여자아이가 있어요. 재즈 찻집의 주인을 하기에는 결혼하는 편이 나을까요? 아니면 독신으로 있는 편이 나을까요?
-A. 당신이 대체 어떤 걸 이득, 또는 손해라고 하는지 잘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만, 세상에 결혼해서 이득을 보는 건 무엇 하나 없습니다.  

Q5. 재즈 찻집의 마스터는 여자아이들에게도 인기가 있다는 얘기를 종종 듣습니다. 그럴만한 때가 오면 여자 손님에게 손을 대도 되는 걸까요? 
-A. 전혀 쓸데 없는 걱정이네요. 

Q6. 레코드는 최저 어느 정도 필요한가요?
-A. 배짱이 있으시다면 15장이면 됩니다. 

Q7. 그래도 '펑키'나 '디그'(*역주* 잘 나가는 재즈카페인 듯)에 가서  레코드 장식장이나 오디오를 볼 때마다 맥이 풀려서 '나 같은게 어딜...' 하는 기분이 되기도 하는데 말이죠.
-A. 그런 곳에 가는 것 자체가 틀려먹은 겁니다. 고쿠분지에 오세요. 

Q8. 저는 전위적인 재즈에 약합니다. 그런 거 말고 다른 재즈를 중심으로 하고 싶습니다만.
-A. 좋으실대로.

Q9. 손님들이 불평을 늘어놓지는 않나요?
-A. 물론 불평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신경을 안쓰면 되죠. 당신 가게니까 원하는 대로.
     그렇게 해서 돈을 버는 것도 당신이고, 적자를 내서 목을 매는 것도 당신이잖아요. 

Q10. 술도 팔 생각입니다만, 취해서 소란피우는 사람이 있으면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A. '전함 바운티'라는 영화가 있었는데요, 거기 보면 이단분자들을 모두 배에서 밀어 떨어트리더군요.

Q11. '스윙 저널'(*역주* 유명한 재즈 잡지)에 광고를 꼭 해야 하나요?
-A. 물론입니다. 거기에 '스트링'과 '주간평단'에도 함께 광고를 내면 효과가 끝내줍니다. 

Q12. 저는 콜트레인의 '지상 최고의 사랑'이 싫어서 가게에는 레코드를 두지 않을 생각입니다만. 친구는 그 레코드가 없는 재즈 찻집따위…라고 말합니다. 어떻게 할까요?
-A. 바보는 상대하지 말아야 합니다. 

Q13. 재즈평론가와 연줄이 좀 있는데요, 레코드 해설이나 콘서트평을 하는 편이 좋을까요?
-A. 테스트 앨범을 받는 정도가 현명합니다. 러시아 혁명시기에 가장 먼저 총살당한 게 재즈평론가라고 하더군요.

Q14. 재즈 찻집을 운영하는 직업이란 게, 평생 계속할 가치가 있는 건가요?
-A. 다나카 가쿠에이(*역주* 비리로 사임한 총리)에게 토건업이란 평생 계속할 가치가 있는 직업인가? 
     카와카미 소우쿤(*역주* 연애소설가)에게 포르노 소설가란 일생동안 계속할 가치가 있는 직업인가?
     고양이에게 있어 캣푸드란 평생 먹을만한 가치가 있는 음식인가? 

     상당히 어려운 문제입니다. 

Q15. 제게 있어 재즈 찻집이란 뭔가 청춘의 이정표인것 같은 기분이 드는데요, 이런 생각은 틀려먹은 걸까요?
-A. 틀려먹은 건 아닙니다만, 과장되어 있는 건 명백하군요.

Q16. 그러면 재즈 찻집이란 대체 뭐란 말인가요?
-A. 재즈 찻집은 인생에 있어 일종의 가치기준과도 같은 것은 아닐까 생각합니다.
     막막한 시간의 흐름 속에서 우리들의 인생이 어떤 방식으로 빛나고, 어떤 방식으로 불타오르게 될까요?
     재즈 안에 푹 잠겨 있을 때, 우리는 그런 '무언가'를 발견할 수도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듭니다. 

Q17. 그런 사고방식은 지나치게 과장되어 있는 게 아닌가요?
-A. 죄송합니다. 말씀하신 대롭니다.
     단지 제가 말하고 싶은 것은, 재즈 찻집 주인이 그런 사명감을 잊는다면 그걸로 끝장이다, 뭐 그런 겁니다. 

Q18. 말씀하시는 건 잘 알겠는데요, 올해 야쿠르트 아톰즈(*역주* 야쿠르트 스왈로즈의 옛 이름)는 어떻게 될까요?
-A. 당연히 우승합니다.
     요미우리는 최하위가 되고, 오 사다하루(왕정치)는 나보나(*역주* 당시 유행하던 과자)의 CM에서 쫓겨납니다. 





원 블로거도 언급했지만, 26살로 고쿠분지에서 재즈카페를 운영하던 하루키는 재치있고 살짝 꼬인 느낌의 주인이었던 듯.

마지막 야쿠르트 아톰즈 질문을 보니 모든 질문과 답을 모두 하루키가 썼다는 느낌이 팍팍오는데, 의문 하나. 야쿠르트 아톰즈가 야쿠르트 스왈로즈가 된 건 1974년부터인데, 1975년에 잡지에 실린 이 글은 여전히 '아톰즈'를 사용하고 있다. 팬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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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jyoo
2012/02/20 17:16


어제(19일)자 중앙 선데이에 크게 실린 사진이다. 보잉(Boeing)사를 방문한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787 드림라이너를 둘러본 뒤 트랩을 내려오는 장면을 수많은 보잉사 직원들이 디지털 카메라로 찍고 있는 모습이다. 신문이 이 사진에 붙인 제목은 '오바마를 찍어라'다.

유명인사(celebrity)를 대하는 일반인의 가장 일반적인 자세는 시대에 따라 변화해 왔다.  유명인사의 저서나 사진, 프린트된 티셔츠, 그도 없으면 하얀 종이를 꺼내 사인(autograph)을 받는 건 디지털 기기가 문명세계를 점령한 지금은 아주 고전적인 방법이다. 그 대신 입으로는 환호성을 지르는 한편, 다른 손으로는 주머니를 뒤적여 카메라를 꺼내 드는 모습이 이제 유명인사가 있는 곳이면 아주 흔한 광경이 되었다. 바로 위의 사진은 요즘의 일반적인 '추세'를 그대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자, 그 다음은 어떻게 될까. 각각 다른 각도와 높이의 수많은 액정화면에 오바마 대통령의 일거수일투족이 정지화면으로, 혹은 동영상으로 가감없이 기록됐을 것이다. 그 화면들은 촬영자 각각의 손끝에서 재생되고, 지인들에게 보여지고, 인터넷에 업로드되겠지. '이건 내가 찍은거야. 내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고.'하는 자부심을 태그로 달고. 

그런데, 나는 저 사진을 보며 어쩐지 답답한 기분이 들었다. 대통령을 직접 본다는 저 흔치 않은 순간, 사람들이 눈이 빠져라 들여다보는 것은 휴대폰(혹은 디지털 카메라)의 화면에 나타난 오바마 대통령이 아닌가. 저 수많은 사람들이 기억하는 오바마는 '내가 본 모습'이 아닌, '내 카메라가 찍은 모습'이 아닌가. 유명인사와 일반인의 사이에 '기계의 눈'이 자연스럽게 개입하고, 기계의 눈에 의해 한 번 '걸러진' 피사체로서 유명인사를 대하는 모습이, 어쩐지 '직접 대면하고 눈빛을 교환하는' 고전적이고 생생한 커뮤니케이션의 즐거움을 밀어내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은 그저 기우일까. 

바야흐로 현대는 디지털 디바이스(digital device)의 전성시대다. 디지털 디바이스가 지배하는 세계에서 인간은 '기록'과 '기억'의 끊임없는 싸움에 직면한다. 그리고, 대개는 '완벽한 것'으로 보이는 '기록'에 주도권을 넘기고 만다. 스스로 불완전하므로 결국 희미해지는 '기억' 대신,  픽셀로 혹은 바이트(byte)로 증명 가능한 '기록'에 매달리는 것이다. 일단 깊이 생각하지 말고 무조건 찍어대다 보면, 사라지고야 말 '기억'을 물리적으로 보완할 수 있지 않겠느냐는 기대가 사람들의 생각을 지배한다.

'기록'과 '기억'의 피말리는 경계선에 섰던 한 남자의 이야기가 오늘 신문에 실렸다. 우연히도 같은 중앙일보가 보도했다.



 미국 록밴드 에반에센스(Evanesence)의 내한 공연장을 찾은 30대 남성이, 공연 전 과정을 비디오카메라로 찍다가 결국 주최측에 의해 퇴장당했다는 내용이다. 공연 주최측은 개인적인 동영상 촬영을 금지하고 있다. 상업적 이용 가능성이 늘 도사리고 있음을 감안해서인 것 같다. 그러나 금지/허용 여부를 떠나, 지금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공연을 자기의 눈으로 보고 느끼지 못한 채 화면 찍기에만 열중한다면, 직접 공연을 보는 감동은 극히 적지 않을까. 나중에 찍은 화면을 제아무리 집에서 돌려 본들, 애초에 얻지 못했던 감동을 뒤늦게라도 얻을 수 있을까. 

 다시 오마마 얘기를 해 보자. 그는 태블릿 PC의 화면에 사인을 한 최초의 대통령으로도 기록돼 있다. 2010년 10월 22일, 오바마 대통령이 시애틀의 워싱턴대학교를 방문했을 때의 일이다. 환호하면서 카메라를 들이밀고, 연신 셔터를 눌러대는 사람들 사이에, 약간 긴장한 표정으로 아이패드를 내미는 남자의 모습이 묘한 대조를 이룬다. 남자의 아이패드에는 손글씨로 이렇게 씌여 있다. "Mr. President, sign my iPad.(대통령님, 제 아이패드에 사인해 주세요.)"



뜻밖의 '아이패드 사인 요청'을 받은 오바마 대통령은, 흔쾌히 이 남자의 요청을 들어주었다. 최초로 아이패드에 대통령의 사인을 받은 이 남자는 실버스타 캔 4세라고, 그리 인상적이지 않은 이름까지 기록에 남겼다. 만약에 그가 주변의 다른 사람들처럼 카메라를 꺼내들고, LCD 화면으로 오바마 대통령을 찍어댔다면, 과연 지구 반대편에 사는 내가 그의 이름을 알 수 있었을까. 캔 4세는 '기록'과 '기억'의 사이에서 자기의 목적을 확실히 달성하고, 덤으로 유명세까지 타게 됐다. 어쩌면 그는 '기록'과 '기억'의 싸움에서 승리를 거둔 훌륭한 사례자로 기억될 것 같다. 심지어, 오바마 대통령도 자기에게 아이패드를 내밀며 사인해달라고 한 이 남자를 기억하고 있을 것만 같다. 셀러브리티는, 바로 이렇게 대하는 것이다. 



 
**이 글은 SBS 뉴스사이트 취재파일로 사용됐습니다** 
http://news.sbs.co.kr/section_news/news_read.jsp?news_id=N1001092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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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jyoo
2011/12/29 22:47

 



요즘 작가 김영하의 [책읽는 시간]이라는 이름의 팟캐스트를 짬짬이 듣는다. 회사와 집이 그리 멀지 않아 빠르지 않은 걸음으로 편도 30분 정도 걸리는데, 출근길에 반 정도를 듣고, 퇴근길에 나머지 반 정도를 들으면 적당하다. 겨울은 겨울이라 바람이 차고 무거워서, 손은 코트 주머니에 푹 찔러넣고, 목도리에 턱 끝을 연신 부비며 귀에 꽂은 이어폰에 온 신경을 집중해서 듣는다. 중간에 안양천을 걸어서 건너는 오목교 구간에서는 눈을 잠시 먼 곳으로 두고 출근길엔 햇빛을, 퇴근길엔 밤하늘을 받아들인다. 귀에서는 조금은 신경질적이면서도 매력적인 김영하 작가의 목소리가, 적당한 속도로 소설을 읽어준다. 

오늘도 그랬다. 아침에 집을 나서, 15층에서 1층으로 내려가는 엘리베이터에 오르면서 아이팟의 플레이 버튼을 눌렀다. 김영하의 팟캐스트 가운데에는 가끔 그런 게 있는데, 오늘도 타이틀이 흘러나온 뒤에는 아무런 소개도 인사도 없이 다짜고짜 '본방'이었다. 거리로 나서 본격적인 출근길에 오르면서, 주머니의 아이폰을 꺼내, 장갑을 벗고, 잠금해제를 하고, 누가 쓴 무슨 소설인지 확인할까 망설였지만, 찬바람이 그런 생각을 날려버렸다. 귀찮았다. 일단 아무런 사전정보 없이 귓속으로 흘러들어오는 내용에 빠져보기로 했다.

올 겨울 추위는 유별나다. 눈도 많이 왔다. 스키캠프 간 손자들한테서 걸려온 전화 목소리가 낭랑하다.

'손자'라는 단어가 탁 걸렸다. 손자를 둔 노인이 화자인 소설이다. 노인 화자를 일부러 피하는 건 아니었지만, 이런 시작의 소설이라면 웬만해서는 스스로 찾아 읽지는 못했을 거라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그래도 나는 눈이 무섭다. 친정어머니가 금년처럼 폭설이 내린 해에 눈에서 미끄러져서 엉치뼈가 망가진 후 노인으로는 견디기 어려운 수술을 여러 번 거쳤지만 결국 보행의 자유는 회복하지 못하고 10년 동안이나 집안에 갇혀 지내다가 돌아가셨다. 지금 내 나이가 그 지경을 당하실 때의 어머니 나이와 같다.
 
게다가, 여성인 노인, 노인인 여성, 즉 '할머니'가 화자다. 김영하의 저음으로 듣는 할머니 화자의 목소리가 처음에는 어색했지만, 듣고 있을수록 이물감은 점점 사라져 마침내 아무렇지도 않게 되었다. 생각해보면 여성 화자의 책(팟캐스트로 듣는 '낭독'이 아니라)을 읽을 때 내 머릿속에서 일어나는 일과 비슷한 과정이다. 

그렇게 출근길에, 그리고 퇴근길에 나는 내가 기억하는 한 거의 처음으로 '할머니 화자'의 소설을 읽었다(아니 들었다).
 
개성이 고향인 어느 사촌 자매의 이야기다. 공부를 잘해 살림이라고는 도통 모르고 자라, 대체로 유복한 가정에 시집을 가서 평생을 '지키고' 지낸 탓에 '진 일'과는 거리가 멀어져버린 다소 쌀쌀한 사촌언니와, 어릴 적부터 장녀로 어머니를 도와 살림을 척척 하다가 어린 나이에 열살 차이도 더 나는 유부남과 정분이 나 끝내 살림을 차린 뒤, 착하지만 경제적 능력은 없는 남편과 함께 사느라 신산한 노년을 보내고 있는 사촌동생이 나온다. 서로 바쁘게 자식 키우며 살 땐 격조하던 자매가, 각각 3년 차이로 남편들을 먼저 보낸 뒤 다시 가까워져 동생이 언니 집에와서 부엌일이며 살림을 도와주고, 언니는 파출부 구하느니 그 돈으로 동생 용돈 줘 가며 지낸다. 언니는 언니라는 가족적 위치와, 용돈이며 먹을 것들을 챙겨준다는 경제적 위치로 인해 동생에게 늘 윗사람 행세를 하려 하지만, 사실 동생의 처지를 걱정하고, 제 살기 바빠 동생을 챙겨주지 못하는 동생의 자식들을 원망한다. 동생은 조금 철부지다. 어디가서 공밥을 얻어먹는 걸 싫어해 몸놀림이 재고, 음식솜씨도 옛날이라면 궁중 숙수를 했을 만큼 좋지만, 남편이 죽기 전날 밤 자기 손을 꼭 붙잡고 '사랑해'라고 말했다는 걸 여기저기 흘리고 다니면서 인정받으려 한다.

그러던 차에, 사람좋은 사촌동생은 아는 사람이 남해의 섬에서 운영하는 민박집을 도우러 간다. 사실 죽은 남편이랑 살던 옥탑방의 찌는듯한 더위를 견디지 못해 피신한 것이다. 피신은 피신이지만 그 민박집에서도 인심좋게 먹이고 쉬게 하려는 목적으로 동생을 부르지 않았을 거라고, 바쁜 성수기에 일손이 부족해 부려먹으려고 불렀을 거라고 언니는 생각한다. 그 짐작이 완전히 틀리지는 않았지만, 동생은 거기서 새로운 사랑을 만난다. 언니는 깜짝 놀라고, 부러움인지 질투인지 걱정인지 모를 복잡한 감정에 휘말린다.

동생에 대한 감정과, 동생이 묘사한 섬 생활과, 아직 본 적도 없는 새 제부-70이 넘은 어부-의 캐릭터가 얽히다가 소설은 결말을 맞는다. '분홍빛 도미'로 상징되는 결말은, 결코 절망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앞길 창창한 희망도 아니다. 화자는 나름 재취에 성공한 것으로 보이는 동생에 대해 이제는 걱정은 덜 하겠지만, 그렇다고 마음 푹 놓고 잊어버릴만큼 안심하는 상황도 아니다. '분홍빛 도미'가 상징하는 그 감정은 다름아닌 그리움이다. 소설은 이렇게 끝난다.

그립다는 느낌은 축복이다. 그동안 아무것도 그리워하지 않았다. 그릴 것 없이 살았으므로, 내 마음이 얼마나 메말랐는지도 느끼지 못했다. 우리 아이들은 내년 여름에 이모님이 시집간 섬으로 피서를 가자고 지금부터 벼르지만, 나는 안 가고 싶다. 나의 그리움을 위해. 그 대신 택배로, 동생이 분홍빛 도미를 부쳐올 날을 기다리고 있겠다.

퇴근하기 직전, 팟캐스트를 다시 켜면서 뒤늦게 확인한 이 소설은 고 박완서 선생의 <그리움을 위하여>다.




나는, 이렇게 올올이 정교하고 다채롭게 펼쳐진 '수다'를 처음 접했다. 어르신들은 흔히 '내 이야기를 쓰면 소설책 몇 권도 더 될거야.'라는 말씀을 하신다. 이 이야기는 몇 번이고 반복해서 그렇게 말하는 것에 지치거나, 에이 설마 하면서 주변에서 믿어주지 않음에 화난 어르신이, '그러니까, 내 이야기는 이런 얘기라고. 들어나 봐.'하면서 진짜로 팔을 걷어붙이고 쓴, 그런 이야기같다.

소설을 듣는 내내, 나는 부모님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 내년이면 이제 환갑이지만 여전히 내게는 그닥 나이든 걸로 보이지 않는 어머니와, 소설속 '동생'처럼 일 잘하고 음식솜씨 좋은 막내이모가 떠올랐다. 당신들이 살아온 인생 속에서 굴리고, 말하고, 전하고, 숨기던 생각들이 어쩌면 이런 느낌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머니나 막내이모가 이 소설을 읽을 기회가 있을까. 만약 읽는다면, 당신들은 이 소설을 어떻게 받아들일까.

김영하는 올해 1월 박완서 선생의 타계 소식을 듣고 이 팟캐스트를 녹음했다고 한다. 그의 블로그에 가서 조금 찾아보니 이렇게 나온다.

박완서 선생님이 22일 오전 향년 8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서가에서 그분이 쓰신 글을 뒤적이다가 그대로 마이크를 연결해 소리내어 읽었습니다.

작가는 자신이 쓴 책에 묻힙니다. 비통한 마음으로 독자들은 영혼의 장지를 배회합니다. 치유는 그렇게 시작되지요. 작가란 그런 존재입니다. 죽어도 죽지 않는. 자신이 쓴 언어 속에서 살아갑니다.

부디 영면하시기를.
 
출처 : 김영하 블로그 '김영하 아카이브' http://kimyoungha.com/tc/146


김영하는 팟캐스트에서, 소설을 다 읽은 뒤 박완서 선생과의 추억을 얘기했다. 고령에도 소녀같은 감성을 갖고 계셨던 선생은 문단의 젊은 작가들, 특히 남자 작가들과 유쾌하고 즐거운 일화들을 많이 만드셨다고 했다. 소주와 이야기를 좋아했다고도 했다. 그러다가 '아...' '음...'을 반복하더니, 급하게 녹음을 마무리했다. 왜 그랬는지, 물을 길은 없지만, 굳이 묻지 않아도 알겠다.

이제 다음달이면 고인의 1주기가 된다. 아직도 비통한 마음으로 '영혼의 장지를 배회'하는 독자들이 많을 것이다. 나는 그 가운데에서도 아주 많이, 늦었다.

부끄럽지만 이제야 처음으로 고인의 작품을 접하고, 다시금 옷깃을 여미고 고인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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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jyoo
2011/12/13 13:12

어제 오전 서해 소청도 근해에서 불법조업중이던 중국 어선들을 단속하던 해경 특공대원 이청호(40) 경장이 중국인 선장이 휘두른 흉기에 찔려 순직하는 사고가 일어났다. 어제 보도된 내용 가운데 가장 비중있는 일이어서 저녁 방송뉴스도 머릿기사로 배치하고, 발생 정황과 수사상황, 외교가 움직임 등 2~3꼭지를 연달아 보도했다. 

사건 발생이 오전시간이어서 조간 신문사들은 일단 인터넷 기사로 대응하며 다음날, 즉 오늘 아침에 낼 기사를 준비했을 것이다. 사건 개요와 흐름을 그림과 도표로 차곡차곡 정리하면서 순직자 빈소가 차려진 병원과 가해자인 중국인 선장이 조사를 받는 인천 해양경찰청에서 전해오는 기사를 적절히 배치했을 터다.

중앙일보 오늘자의 경우 1면 톱기사 제목을 "그들은 어부가 아니라 해적이었다"라고 크게 뽑고, 인천해양경찰서로 압송되는 중국인 선장의 사진을 실었다. 그리고 3면 전체에 자세한 사건개요와 외교적 대응을 보도했다.

눈길을 끈 건 3면 상단을 차지한 그래픽 뉴스다. '해경특공대 사망 사건 재구성' 이라는 제목이 붙어있고 중국어선 발견부터 해경특공대 출동, 중국어선과의 대치, 진압, 부상, 후송 등 각 단계별로 설명이 되어있고, 우측 하단에는 이청호 경장이 중국인 선장의 흉기-깨진 유리조각이라고 한다-에 찔리는 모습(삽화)이 그려져 있다. 이런 그림이다. 

 

이 경장이 흉기에 찔리는 모습을 기자가 직접 봤을리가 없으니 어디까지나 상상도의 범주에 속하는 그림이다. 그런데 어쩐지 낯이 익은 자세와 구도다. 잠시 생각하다가 답을 찾아냈다. 다음의 사진을 보자.

 
찔린 사람과 찌르는 사람의 자세가 중앙일보가 그린 상상도와 일치한다. 이 사진을 베이스로 놓고 찌른 사람을 중국인 선장으로, 찔린 사람을 해경 특공대원으로 '덧칠'했음이 틀림없다.

이 사진은 1960년 10월 22일 일본 도쿄 히비야공회당에서 열린 자민당, 민주당, 사회당의 3당 합동연설회에서 당시 사회당 위원장이었던 아사누마 이네지로가 우익 청년에게 암살당하는 장면을 당시 현장에 있던 마이니치 신문사 소속 사진기자 나가오 야스시(長尾 靖) 찍은 것이다. 아사누마 위원장은 연단에서 한 번 찔리고, 곧이어 두번째로 찔렸는데, 사진에 담긴 순간은 두번째 찔린 뒤 암살범이 아사누마 위원장의 몸에서 칼을 뽑은 순간이다. 이 극적인 사진 한 장은 'Tokyo Stabbing'이라는 제목으로 1961년 퓰리처상을 수상했다. 엄청나게 유명한 보도사진이라는 얘기다. 

중앙일보가 그래픽 뉴스를 준비하면서 저작권 문제를 해결했는지, 아니면 저런 사진을 원용하는 데에는 저작권 문제는 없는 것인지 나는 아는 바가 없다. 다만, 찌르고 찔리는 한 순간을 묘사한 오늘 신문의 그림이 사실은 일본 정치사의 '오점'으로 기록된 바로 그 장면을 베낀 거라는, 약간의 아이러니가 마음에 좀 걸린다. 

 
(추가) 해경 발표에 따르면 이청호 경장은 유리조각이 아닌 '칼'에 찔렸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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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2/03 15:47


[한겨레] 왕따 쿠바의 '행복한 저공 비행'(클릭)

일본은 올해 3월 11일 동일본 대지진 이후, 원자력 발전에 의존하지 않은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기 위한 대안을 모색하고 있다. 특히 저성장을 더이상 '악'으로 규정하려 하지 않는 움직임이 확연하다. 그런 의미에서 풍족하지는 않지만 부족함도 없고, 성장 일변도의 분위기가 추구하는 '로드 자전거'같은 위태로운 사회가 아니라, 빠르지는 않지만 소박하고 안정적인 '세발 자전거'같은 사회를 추구하는 듯 보이는 쿠바가 대안일 수 있다는 이 책의 지적은 그 자체로 상당히 흥미롭다.

기사를 찬찬히 읽어보면 국제 정세라는 외부적인 요인으로 '고립'을 택할 수 밖에 없었던 중남미의 대표적인 저성장국가 쿠바가 어떤 식으로 현실을 받아들이고, 주어진 자원 안에서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보편적인 '삶'을 보장하게 했는지에 대한 단초를 엿볼 수 있을 것 같다. 이를 가능하게 한 저자 '요시다 다로'에 대한 설명도 충분히 호기심을 자극한다. 

다음은 한겨레 서평 기사의 마지막. 

지은이는 “경제성장을 하지 않으면 풍요롭게 살 수 없다는 강박관념은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며 “한국과 일본이 검소하면서도 궁상스럽지 않은 쿠바에서 ‘그리운 미래’ 또는 ‘안전한 몰락’의 희망을 찾을 수 있다면 이 책은 역할을 다한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운 미래'와 '안전한 몰락'. 과거 회귀를 뜻하는 '그립다'라는 형용사와, 무조건적인 '악'으로 치부되던 '몰락'이라는 명사가, '미래'와 '안전'이라는 전혀 다른 단어와 만나 선사하는 울림이 크다. 기존의 시각에서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지만, 앞으로는 이런 표현이 사람들에게 더 다가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조선일보] 악한 vs. 악한…203일간의 대혈투, 장병 250만이 죽어갔다(클릭)

조선일보는 [세계사 최대의 전투]라는 책을 해당 면 머릿기사로 소개했다. 1941년 나치 독일과 소련의 대규모 전투를 다룬 논픽션이다. 흘러간 전쟁과 참사, 그리고 그 속에서 큰 역할을 담당한 영웅(혹은 반영웅)에 대한 관심은 주로 보수의 프레임 안에서 상대적으로 중요하게 다뤄진다. 제목에는 '장병 250만이 죽어갔다'며 시선을 낮춘 듯 했지만, 기사는 대개 스탈린과 히틀러가 서로 주고받은 감동과 결탁, 그리고 배신의 역사를 설명하고 있다. 실제 책에는 250만의 삶이 어떻게 묘사돼 있는지 모르겠지만, 소련군의 지휘문서 등을 추적해 구성한 논픽션이라는 점에서, 대개는 군사 지휘자들의 고민과 결론을 그렸을 가능성이 높다.

소설이 아닌 이상, 이런 종류의 논픽션 역사서가 취할 수 있는 극히 제한적인 서술방법이야 어쩔 수 없다고 하더라도, 프레임이 좀 후지다는 느낌은 지울 수가 없다. 밀덕보다는 역사덕(?)에게 더 어필할 만한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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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jyoo
2011/12/02 11:11






배 작가를 비롯한 SF 작가들은 '공상과학'의 '공상'에 특히 거부감을 갖고 있는 듯.

실제로 SF 소설들은 현실에서 강한 모티브를 얻거나, 현실을 대차게 비꼬는 경우가 많다는 것을 감안하면,
그저 '머릿속 공허한 상상'이라는 뜻의 '공상'이라는 말이 얼마나 불편하게 느껴질지 짐작하고도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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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jyoo
2011/11/20 19:54




[칼의 노래]와 [현의 노래], 그리고 [남한산성]으로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까지는 아니어도 '나오면 읽어야 할' 작가 리스트에 두고 있는 김훈이 [흑산]이라는 소설을 냈다. 요즘 세상에 글 쓰는 '괴로움'을 김훈만큼 절절하게 호소하는 작가도 없다 싶어서, 첫 장을 펼치기 전부터 괜히 숙연해졌다. 2년동안 살던 집을 떠나 새 집으로 이사하는 등 이래저래 복잡한 상황 때문에, 2주만에 간신히 드문드문 읽어서 겨우 어제 책을 덮었다. 

매와 밥, 길…그리고 책

김훈의 글에는 읽는이의 오감을 극한까지 치닫게 하는 화려함도, 새로운 언어를 던져 낯선 쾌감을 길어올리는 즐거움도 그닥 없다. 대신 김훈은, 익숙하지만 애매해서 좀처럼 감성이 가 맞닿지 못했던 일상의 변방에서 뭔가 고민해야 할 것 같은 화두를 발굴하게 한다. [칼의 노래]에서 묘사했던 '밥과 싸움', [남한산성]에서 지루하게 그렸던 고립된 자의 조바심, [현의 노래]에서 설화처럼 풀어냈던 '삶과 죽음의 무상함'이 그것이다. [흑산]에서는 '매(丈)와 책'이 그런 감상을 던져준다. 

형틀에 묶이는 순간까지도 매를 알 수는 없었다. 매는 곤장이 몸을 때려야만 무엇인지를 겨우 알 수 있는데, 그 앎은 말로 옮겨질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책은 읽은 자로부터 전해들을 수나 있고, 책과 책 사이를 사념으로 메워나갈 수가 있지만, 매는 말로 전할 수 없었고, 전해 받을 수가 없으며 매와 매 사이를 글이나 생각으로 이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매는 책이 아니라 밥에 가까웠다. (p.13)


그렇다면 매와 가깝다는 '밥'은 어떠한가. 원래 친절한 작가는 아니지만, 조금 뒤에 설명이 나온다.

무릇 배고픔을 면하자면 오직 먹어야 하는데, 하고 많은 끼니 중에서도 지금 당장 먹는 밥만이 주린 배를 채워줄 수가 있습니다. 아침에 먹은 밥이 저녁의 허기를 달래줄 수 없으며, 오늘 먹는 밥이 내일의 요기가 될 수 없음은 사농공상과 금수축생이 다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똥이 되어 나간 밥이 창자를 거슬러서 되돌아올 수 없으므로, 눈앞에 닥친 끼니의 밥과 지금 당장 목구멍을 넘어가는 밥만이 밥이고 지나간 끼니의 밥은 밥이 아니라 똥입니다. (p. 23)


매와 밥의 성질과 같은 것이 또 있다. 그것은 '길'이다.

길은 늘 앞으로 뻗어 있어서 지나온 길들은 쉽게 잊혔지만, 돌아올 때는 지나온 길이 앞으로 뻗었고, 갈 때 앞으로 뻗어 있던 길이 다시 잊혔다. 길은 늘 그 위를 걸음으로 디뎌서 가는 사람의 것이었고 가는 동안만의 것이어서 가고 나면 길의 기억은 가물거려서 돌이켜 생각하기 어려웠다. (p. 43)



매와 밥과 길. 그리고 그 반대편에 있는 책. 다른 건 몰라도, 반대편에 있는 것이 '책'이라면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유자(儒者)들이 오매불망 애지중지하는 경서도 책이고, 대왕대비가 방울 세 개를 매달아 팔도로 내려보내는 말도 넓은 의미의 책이고, 사학(邪學, 즉 천주교) 죄인들이 숨겨놓고 보는 언문 기도문도 책이다. 매와 밥과 길은 세상이 어찌되든 결국 인간의 곁에서 두려움과, 욕망과, 갈망을 받는 존재라면, 책은 '생각 있는 자'들의 한시적인 도구다. 좋은 싫든 당면한 현실을 구성하는 것이 매와 밥과 길이라면, 저기 다른 세상으로 가고자 하는 욕구를 여기에 풀어 놓은 것이 책이다. 매와 밥과 길이 상징하는 당면한 현실의 신산한 고통…그러나 외면하지 못할 삶의 자리. 바로 김훈 작품의 핵심에 존재할 법할 말이다. 이런 식으로.

순매를 안으면서 정약전은 여자의 몸속을 헤엄쳐 다니는 작은 물고기 떼의 환영을 느꼈다. 순매의 몸은 헐렁했고 질척거렸다. 정약전은 순매의 몸이 바다 가운데 뜬 섬처럼 느껴졌다. 그 몸은, 수평선 너머에 있다는 육지와는 아무런 관련도 없는, 섬의 몸이었다. 그 몸에 물기가 고여 있었고, 물고기 떼의 환영이 헤엄치고 있었다. 순매의 몸을 안으면서, 정약전은 끌려온 곳에서 살 수밖에 없음을 알았다. 당면한 곳만이 삶의 자리라고, 질퍽거리는 순매의 몸이 말하고 있었다. (p. 302)


소설은 1801년 신유박해를 전후한 조선의 천주교인들을 다루고 있다. 사학죄인으로 파직된 뒤 흑산도로 유배된 정약전과, 충청도 제천 배롬에 숨어들었다가 끝내 들켜 참수당한 약전의 조카사위 황사영이 중심인물이다. 같은 '사학죄인'인 약전과 사영의 삶의 궤적은 평행선을 그리지만, 끝은 어딘가 해석의 자유를 남긴다. 육지에서 멀리 떨어진 흑산에는 신유박해의 칼바람이 직접적으로 미치지 않고, 황사영이 숨어든 배롬에는 결국 포청 관원들이 들이닥친다. 약전은 섬에서 들인 순매에게서 아들을 낳고, 황사영은 도피하기 직전 부인 명련을 통해 역시 아들을 얻는다. 순매가 낳은 약전의 아들은 약전이 흑산에 세운 서당에서 글을 읽고, 사영의 아들 경한은  제주 대정의 관노로 쫓겨가던 어미 명련이 뱃길에서 빼돌려 추자도에 내려놓는다. 서로의 존재를 알지 못하는 외 6촌 두 형제가 남도에서 각자의 삶을 이어가게 된 것이다. 이후 이들의 삶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은 소설에 없지만, 큰 틀에서 김훈의 의도를 짐작할 수 있을 것 같다. 

당대를 온몸으로 살아가라.

소설은 두 인물을 둘러싼 상황을 오가며 숨가쁘게 진행되는데, 약전의 주변에는 흑산의 어부와 수군 관리들이, 황사영의 주변에는 옹기굽고, 말 다루는 '천한' 민초들이 있다. 이제는 확실하게 '김훈 스타일'이라고 불러도 좋을까. [칼의 노래]의 '여진'과 [남한산성]의 '서날쇠', [현의 노래]의 '아라'의 계보를 잇는 인물들이 [흑산]에서도 다양하게 등장한다. 선악으로 깔끔하게 구분되지 않되, 다만 당대를 헤쳐 나간, 혹은 그러다 스러진 인물들이다. 역사 속 인물인 정약전과 황사영이 플롯을 지탱하는 뼈대라면, 이들은 이야기의 살을 찌우는데, 그 살이란 결국 당시의 시대상에 이리저리 찢기고 베인 흔적이 고스란히 박혀 있는 날것 그 자체다. 살은 끝내 뼈에도 큰 영향을 미친다. 

약전은 '흑산(黑山)'이라는 섬 이름을 스스로 고쳐 부르고, 새 이름을 제목으로 한 책을 쓴다. 약전의 책은 이 세상에서 저 세상을 그리는 기존의 책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 당면한 현실을 건조하게 직시하려는 새로운 시도를 담았다. 바로 자산어보(玆山魚譜)다. 

흑산에 대한 무서움 속에는 흑산 바다 물고기의 생김새와 사는 꼴을 글로 써야 한다는 소망이 자리 잡고 있었다. 물고기의 사는 꼴을 글로 써서 흑산의 두려움을 떨쳐낼 수도 없고 위로할 수도 없을 테지만, 물고기를 글로 써서 두려움이나 기다림이나 그리움이 전혀 생겨나지 않은, 본래 스스로 그러한 세상을 티끌만치나마 인간 쪽으로 끌어당겨볼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물고기의 사는 꼴을 적은 글은, 사장詞章이 아니라 다만 물고기이기를, 그리고 물고기들의 언어에 조금씩 다가가는 인간의 언어이기를 정약전은 바랐다. (p. 337)



황사영과 주변의 인물들이 사학죄인으로 처참하게 처형당한 뒤, 소설은 간단한 후일담만을 언급하고 끝을 맺는다. 소설이 끝난 뒤의 작가 후기가 소설을 계속 이어가는 느낌이 드는 것은, 이 소설이 3인칭 전지적 작가시점을 택해서만은 아닌 것 같다. 여운이 남은 채로 읽어들어간 작가 후기에서 김훈은 이 소설을 쓰게 된 연유를 설명하며, 이렇게 마무리했다. 

나는 말이나 글로써 정의를 다투려는 목표를 가지고 있지 않다. 나는 다만 인간의 고통과 슬픔과 소망에 대하여 말하려 한다. 나는, 겨우, 조금밖에는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말이나 글로써 설명할 수 없는 그 멀고도 확실한 세계를 향해 피흘리며 나아간 사람들을 두려워하고 또 괴로워한다. 나는 여기에서 산다.

늘, 너무나 많은 말을 이미 해버린 것이 아닌지를 돌이켜보면 수치감 때문에 등에서 식은땀이 난다. 이 책을 쓰면서도 그러하였다. 혼자서 견디는 날들과, 내 영세한 필경의 기진한 노동에 관하여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다. (p. 387)


어디 김훈뿐이랴. 모두가 당대를 몸으로 부딪혀 상처입고, 고쳐가며 살아갈 뿐이다. 말은 온 사방에 너저분하게 피어 오르지만, 진짜 해야 할 말은 어디에도 없을지도 모른다.

그걸 잊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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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jyoo
2011/11/01 09:11



생각해 볼 거리로 가져옴. 스토리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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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jyo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