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02/02 14:24



SBS의 이른바 '한국최초 우주인 프로젝트'가 일부 네티즌들에게 몇백 억 짜리 관광 프로젝트라며 비난받고 있던 시절 괜시리 뚱하는 마음에 블로그에 '우주, 우주인, 그리고 상상력'이라는 게시를 쓰면서 나라는 인간은 문과생인 주제에 이쪽 주제에 관심이 꽤 있다는 걸 새삼 느낀 적이 있다. 사실 중학생 시절 입시수학이라는 괴물을 만나기 전 까지 '천문학자'가 되겠다는 꿈을 갖고 있었으니까 그 관심은 굉장한 개인적 뿌리를 갖고 있다고도 할 수 있겠지.

'천문학자'가 되려는 꿈을 일찌감치 포기한 이후에도 과학 밖의 영역, 다시 말해 '문학'에서 접하는 우주에 늘 관심이 있었다. 과학을 직접적으로 다룬 SF문학이 아니라 오히려 과학 이전에 철학을 생각나게 하는 작품들이었는데, 언젠가 이곳에 글을 쓴 오에 겐자부로의 '치료탑·치료탑 혹성(이하 '치료탑')'과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파피용'같은 것들이 바로 그런 작품들이었고, 사람의 머리 속 사유의 세계도 하나의 우주라면, 역시 같은 작가의 '타나토노트'까지 포함되는 그런 소설들.

우주의 실체가 어떻든간에, 앞으로 과학이 발전하는 한, 이론을 증명하는 인간의 노력은 점점 세밀해지고 정확해질 것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그 전에, 인간은 '인간 대 우주'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하고, 어떻게 대응해 나가야 할 지를 먼저 고민해야 한다. 결국 중요한 것은 상상 속에 존재했던 우주가 과학적으로 얼마나 증명됐는지가 아니라 우주를 대하고 우주와 접하는 우리들의 자세가 아닐까, 끝내 이루지 못한 '천문학자'의 꿈이 남겨진 자리에 꾸역꾸역 소설을 집어 넣으면서 난 내내 그렇게 생각했었다. 변명이기도 하고, 그래도 행복한 타협이기도 한 그럼 느낌. 그리고 얼마전 PIXAR의 새 영화 '월E'를 보면서 이 영화와 그동안 읽어왔던 다른 작품들-우주 진출(?)을 다룬-과의 관계를 자연스럽게 떠올리게 됐다.  






'월E'는 '치료탑'과 '파피용'의 중간 정도의 플롯을 가졌다. 일단 세 작품의 공통점은 인간이 피로와 오염으로 가득 찬 지구를 떠나 다른 '지구'를 찾는다는 것이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세 작품 모두에서 지구는 쓰레기로 가득찼거나, 자원이 고갈됐거나, 마지막 남은 인류의 악다구니로 가득한 곳이다. 이 답답하고 숨막히고 가망없는 지구를 떠나기 위해 인간들은 이른바 '인류 이주계획'을 고안하는데, 이걸 어떻게 실행하는지에 대한 묘사는 세 작품이 다 다르다. 그리고 달라도, 너무, 다르다.

'치료탑'의 인간은 '대탈출'이라는 용어로 엑소더스를 통칭한다. 그것은 지구에 남아있는 모든 자원과 재화를 끌어모아 동시에 우주로 탈출한 뒤, 새로운 지구를 모색하는 전지구적인 '탈출'이다. 다만 신기한 것은 소설의 초점이 대탈출이 아니라, 대탈출 이후의 지구에 맞춰진 것. 우주에 나간 소수 엘리트의 생존을 위해 지구에 남은 사람들은 희생을 감내한다. 그리고 남은 사람들끼리 어떻게 소박하고 조용하게 삶을 마칠 것인지를 고민하고...물론 소설은 그렇게 단물을 쪽쪽 빨아먹으며 우주로 나갔던 사람들이 (마치 메시아를 연상시키는) 종교적 메타포에 집단으로 '감염'된 상태로 지구에 다시 귀환하면서 복잡한 양상으로 전개되기는 하지만, 소설이 거기까지 나가기 전의 그 고요한 상태, 다시말해 질박하고 순수하고, 오히려 시끄러운 (잘난) 놈들이 다 떠난 뒤 남은 그 '홀가분함' 속의 생활이 나는 오히려 마음에 들었다. 그것이 '대탈출 선단'에 뽑히지 못한 대부분의 평범한 사람들-아마도 실제라면 나도 포함될-의 삶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파피용'은 계산적이다. '치료탑'과 '월E'의 지구에 비해 '파피용'의 지구는 좀 덜 오염된 상태지만, 돈 많은 한 선구자에 의해 '발전 가능성이 있는' 인간들이 자발적으로 지구를 떠난다. 14만 4천명이라는 (상대적으로 적은) 숫자도, 뽑히지 못한 사람들의 시기와 질투, 협박도, 마치 이집트 땅을 떠나 가나안을 향하는 구약성경의 내용을 연상시킨다. 그들은 지구를 돌아보지 않고, 지구로 돌아오지도 않으며 그 안에서 자기들만의 역사를 반복하며 서서히 무너져가다가 (극적으로) 마치 최초의 인류인 아담과 이브처럼 한 곳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 '파피용'이 담고 있는 가장 큰 메타포는,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지구도 먼 옛날에 이렇게 지구에 정착한 한 쌍의 선조에서 시작되지 않았을까, 하는 질문이다. 결국 인간의 역사는 어느 별, 어느 곳에서도 이렇게 반복되고, 굳이 기억하지 않더라도 우리의 의식 어딘가에 새겨진 '프론티어 정신'이 있다면 인류는 어느 곳에서도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살아가는, 만들어가는 '역사'의 무수한 잔인함과 구제불능 오류는 차치하고서라도.

'월E'는 어쩌면 가장 현실적이다. 애니메이션이 가장 현실적이라니 조금 이상하지만, 청소로봇 월E와 탐색로봇 이브의 이야기인 메인 플롯을 제외하고, 영화에 나오는 인간들의 모습만을 놓고 보자면 그렇다는 얘기다. 사실 '치료탑'은 SF를 소재로 다룬 종교와 인간의 이야기이고, '파피용'은 과학으로 포장된 '인류탄생설화'임을 감안한다면 '월E'의 인간은 비록 과장됐지만 앞으로 우리 인류가 겪어야 할 지도 모를 가장 가까운 미래의 인간들이다. 뚱뚱하고 멍청한데다 움직이는 침대 없으면 아무것도 못하는 그런 개개인의 인간이 그렇다는 얘기가  아니라, 거대기업에 유·무형으로 종속되고 기계문명에 자발적으로 함몰되는 인류의 모습을 극한으로 수렴한 뒤 애니메이션的인 유머와 과장을 더하면 '팟'하고 산출되는 인류의 표본을 다루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그 계기가 '이브'가 됐든, '월E'가 됐든, 대오각성해서 생명이 되살아난 지구로 돌아온다는 것은 '치료탑'과 '파피용'의 긍정적인 혼합으로 읽힌다. 지나치게 미국적인 낙관주의와 중상주의(돌아온 지구에서 Buy & Large社가 할 역할이 분명히 있을 것이다. 결국 B&L의 존재는 '세계를 지배하는 것은 정치라 아니라 경제'라는 것을 역설적으로 드러내는 것이 아닐까.)가 조금 불편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현실적이라는 것이 바로 영화 '월E'의 매력이랄까.





**2008년 8월 29일 SBS 기자블로그에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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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jyoo
2012/02/01 19:54






지난 해 인터넷팀에서 일을 핑계삼아 '업무중 서핑'을 대놓고 즐겼던 저는 사회부 사건팀인 지금도 그 버릇을 못 버리고 있습니다. 물론 사안에 따라 가끔은 인터넷에서 쓸만한 아이템이 나올 '수도' 있기 때문에 서핑이 업무와 절대로 관계가 없다고는 할 수 없겠죠. 요점은 바쁜 일이 있을 때도 한가롭게 업무와는 관계없는 서핑을 하느냐인데, 저는 그럴 수 있을 정도로 과감한 배포의 소유자는 아닙니다.

서핑을 할 때 제가 가는 곳은 사실 몇몇 사이트로 한정돼 있습니다. 예전에는 주요 포털의 뉴스와 댓글을 읽는 정도였는데, 그 정도로는 성이 차지 않아서 찾아낸 '거대 커뮤니티'들입니다. 어디라고 밝히기는 좀 쑥스러우니 그냥 '야구 좋아하는 사람들의 게시판'와 '차 한 잔 하면서 DVD보는 사람들의 게시판'정도로 해 두죠.(이 두 곳은 사실 꽤 유명하니 '아, 거기구먼'하시는 분들도 꽤 많으실 겁니다.^^)

가끔 그런 게시판에서 올라온 글을 읽다보면, 불편한, 그러나 읽을 수 밖에 없는 글들이 있습니다. 바로 언론에 대한 불신, 특정 언론사에 대한 비난 같은 글입니다. 그 글들은 때로는 내부에서도 반성하고 있는 부분을 아프게 지적하기도 하고, 날카로운 분석으로 고개를 끄덕이게도 하지만, 또 때로는 (당하는 입장에서) 좀 억울하게 느껴지는 것들도 있습니다. 그 화살이 제가 몸담고 있는 회사를 향하고 있을 때, 생각 같아서는 당장 로그인해서 사실은 이렇습니다,라고 댓글을 달고, 논박하고 싶지만 어차피 인터넷의 한 게시판에서 익명으로 제기되는 의견이니까 오히려 이쪽이 남우세스러워질 테죠.

최근에는 SBS가 기획한 '우주인 방송'이 네티즌들의 도마에 올랐습니다. 정부가 국민 세금을 한 사람의 이른바 '우주 관광'에 썼다, 그 과정을 지상파 방송사가 '오버'해서 중계하면서 '전파 공해'를 만들어냈다...게시판의 글들은 주제를 부각시키기 위해 날선 단어들로 채워져 있었고, 그 과정에서 개인과 집단에 대한 원색적인 비방도 난무했습니다. 그 글들은 마치 '혓바늘' 같아서, 쓰리고 아프면서도 끝내 건드려 보고야 마는 어두운 마력이 있었습니다.

다만, 비판 뒤에 이어져야 할 대안이 극히 부족하다는 사실이 씁쓸했습니다. 한국최초 우주인 사업에 대한 비판과 붐업(boom-up)을 위한 방송에 대한 비판을 하나로 뭉뚱그린 '통합의 능력'이 놀라웠습니다. 조목조목 날카롭게 파고드는 비판 보다는 지엽적이고 말초적인 비난에 '묻어가는' '일부' 네티즌들의 속성이 더더욱 실망스러웠습니다.

솔직히 이번 '우주인 방송'은 사내외 공통적으로 날카로운 지적을 받았습니다. 보기는 많이 봐 왔지만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는 일이었고, 현지 취재 시스템의 문제도 있었지만, 역시 '처음'이라는 미숙함이 크고 작은 기술적 실수로 이어진 부분이 일부 있었던 것도 사실입니다. 내용 보다는 방송의 '총량'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주관 방송사로서 이 정도 규모의 행사를 남의 일 보듯 흐지부지 지나쳐 보낼 수는 없다는 것도 고민거리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방송을 떠나 '한국최초 우주인 사업'을 국고낭비로 매도하는 시각은 주관방송사에 근무하는 일개 기자가 아니라 '납세자'의 일원으로서 받아들이기가 어려웠습니다. 국고낭비는 회생가능성이 희박한 경쟁력없는 공기업에 정치적인 이유로 포도당 링거를 주사하듯 무더기 예산을 책정하거나, 선거 공약을 실천한다는 빌미로 쓰지도 못할 유령공항을 만드는 것 같은 정책을 비판할 때 쓰이는 말입니다.(예전에 <뉴스추적>에서 방송을 제작한 적이 있습니다.) 그런 것에 비하면 이번 우주인 사업은 투입 대비 산출(가능성)이 훨씬 클 수도 있다는 것이 개인적인 견해입니다.

왜 그럴까요? 그것은 우주인 사업이 공기업 회생이나 지방공항 건설과는 달리 우리의, 우리 아이들의 '상상력'을 자극하기 때문입니다. 또 백 권을 책을 읽고, 백 시간의 수업을 들어도 얻지 못할 소중한 경험을 우리에게 제공하기 때문입니다. 우주정거장에서 우리말로 '안녕하세요?'라고 전송되는 인사를 들으신 적이 있으십니까? 한국인 이소연씨가 캠코더를 들고 설명하던 우주정거장의 내부를 기억하십니까? 카메라 셔터같은 창문을 돌려서 열면 태양전지판 아래로 펼쳐져 있던, 말로는 절대로 상상할 수 없었던 푸른 지구를 생생한 동영상으로 보셨습니까? 멋대로 뿌리를 뻗어 사방으로 자라던 콩나물과, 무중력 상태에서도 앵앵거리며 가열차게 살아 움직이는 초파리들을 보셨습니까? 해당 분야의 연구자들이나 보던, 그것도 제한적으로 찔끔찔끔 나오는 외국의 자료들로만 접하던 화면들을 TV에서 모두가 함께 본 적이 있으십니까? 집에서, 일터에서, 가족들과, 친구들과 이처럼 생생한 우주에 대해 이야기를 나눠 본 경험이 예전에는 있으십니까?

지구에서도 동북아시아 한 귀퉁이, 좁은 땅덩이에서 아둥바둥 살아가며, 몇 제곱미터 안 되는 집값의 등락과 부쩍 오른 물가에 온 신경을 다 쓰고 있는 우리지만, 잠깐이라도 우리 머리 위의 공간에 대한 관심을 작은 사치처럼 누리며 저 끝에는 뭐가 있을까, 저 너머에서는 우리가 어떻게 보일까를 상상하는 것. 이번 한국최초 우주인 사업의 의미는 바로 여기에 있는 게 아닐까요?

모두가 우주에 관심을 가져야 할 의무는 당연히 없습니다. 소유즈-TMA가 이전의 소유즈와 무엇이 다른지 줄줄 꿰고 있지 않아도 됩니다. 언젠가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파피용'과 오에 겐자부로의 '치료탑/치료탑 혹성'에 대한 얘기(클릭-새창)를 다른 블로그에 쓴 적이 있습니다만, 작은 상상이 우리의 팍팍한 삶에 오염되지 않은 '청정지대'로 남을 수 있다면, 또 늘 바쁜 일상이지만 문득 하늘을 올려다 보며 저 너머를 상상해 볼 수 있는 시간을 잠깐이라도 가질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뜻을 가진 사람들이 그런 상상의 결과물들을 우리 글로, 우리 말로, 우리가 그린 그림과 우리가 찍은 영상으로 풀어내 모두와 공유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알게 되면 보이나니, 그때 보이는 것들은 전과 같지 않으리라'는 누군가의 말은 TV에서 생중계되는 우주의 모습을 본 지금의 우리에게 더 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앞으로도 한 동안 우주는 힘 있고 돈 있는 강대국들의 무대일 것입니다. 앞으로도 한 동안 우주에 가려면 그들에게 기대어, 말 그대로 '다리라도 붙잡아야' 할 것입니다. 앞으로도 한 동안 항공우주기술은 그들이 주도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번 한국최초 우주인 사업은 우주를 '영원히 그들의 영역'에서 '언젠가는 우리의 영역'으로 끌어 올 수 있다는, 끌어 와야겠다는 생각을 갖게 하는 중요한 시발점이 될 것입니다. 시작치고는, 이 정도면 괜찮습니다.


**2008년 4월 17일 SBS 기자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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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jyoo
2012/02/01 15:41




대학 1학년때, 과외를 가르치던 녀석이 뜬금없이 소개팅을 시켜 주겠다며 
자기 고종사촌 누나의 삐삐번호를 건네주었습니다. 

'공부나 잘하면 됐지, 뭐 이런 걸 다 해주냐'며 핀잔을 주었지만 
'만나보시면 생각이 달라지실걸요'라고 능청스럽게 대답하는 녀석의 말에 
밑져야 본전이라는 생각으로 연락을 했었죠. 

인천에서 서울 학교까지 통학하던 저는 
그 여자아이가 만나자고 하는 '강남역'이 도통 시끄럽고 복잡하며 
쓸데없이 물가가 비싼 곳이라는 생각에 처음부터 기분이 좋지 않았습니다. 

뉴욕제과며 타워레코드며 하는 사람 많은 장소도, 
딥하우스니 터보니 하는 나이트클럽도 저는 별로 좋아하지 않았거든요. 

차 시간을 잘못 계산해 약속시간보다 30분이나 먼저  
'OP10'이라는 이름의 카페에 들어간 순간 만사가 다 귀찮아져서 
그냥 빨리빨리 차 마시고 저녁 간단하게 먹고 집에 가자,는 생각만 했습니다. 

아, 그런데 그녀는 너무 아름다웠습니다. 
너무 아름다워서, 앞에 앉은 제가 한없이 작아지는 느낌이었습니다. 

이런 아이라면 틀림없이 눈도 높을거야. 
이런 아이라면 분명히 주변에 남자도 많을거야. 
이런 아이를 사귀려면 돈도 많이 들겠다. 

웃으면서도 뭔가 머리를 세게 얻어맞은 듯 어지러웠습니다. 

'어디 아파?' 
만난 지 3분만에 동갑이니 말을 트자고 한 그녀가 물었습니다. 

'아...아니...괜찮아.' 
제 목소리가 다른 사람 목소리처럼 머리속을 울렸습니다. 

'뭐 좋아하니? 술 마시러 갈까?' 

'그...그럴까?' 
그래, 술이라면 덜 어색하겠지. 

길도 잘 모르는 나를 이끌고 그녀가 발길을 향한 곳은 
'렉서스'라는 이름의, 당시 유행했던 일종의 '락카페'였습니다. 

코로나 맥주에 피스타치오를 먹으면서 
시끄러운 음악 속에서 이런저런 얘기, 사실 별 시덥잖은 얘기를 나누었습니다. 

'자주 오니, 이런데?' 

'그냥 가끔 와. 넌?' 

'음...난 그냥 학교 앞 호프집에서 마시지...' 

'나도 친구들이랑은 학교 앞에서 놀아.' 

'그럼 여기는?' 

'그냥, 처음 만났지만 같이 가도 괜찮다고 생각했어.' 

으음...대체 무슨 의미인지. 

코로나 맥주병이 나무 테이블 위에 두 줄로 늘어서기 시작할 무렵, 
그녀가 반쯤 마신 맥주병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나 춤을 추기 시작했습니다. 

아니, 춤이라고 하기에는 덜 본격적이고, 
취한 듯 눈을 살짝 감고, 음악에 몸을 맡겨 흔들흔들... 

그 음악은 저도 이미 알고 있는 곡이었습니다. 
고등학교때 CD가 녹아내릴만큼 들었던 
라디오헤드의 파블로 하니 앨범. 그 유명한 creep. 

어색하게 테이블에 걸터앉은 내 앞에서 
긴머리를 찰랑거리며 흔들거리는 그녀를 
가게 안에 있던 많은 사람들이 바라보았습니다. 

조금 우쭐하기도 하고, 조금 당황스럽기도 하고... 

그녀는 다른 사람의 시선따위 항상 받는 거라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춤을 추면서 가끔 나를 보고 웃어주었습니다.  

그 때마다 그녀의 미소를 배경으로 찰칵, 하는 셔터소리가 귓전에 울리고, 
그대로 시간이 멈춰지는 것 같았습니다. 

그대로, 코로나 맥주의 CF로 써도 되겠다고 생각할 정도로, 
그건 정말이지 멋진 그림이었습니다. 
 






소개팅을 주선한 과외둥이 녀석은 
소개팅을 한 다음날 공부시간에 
'사촌누나가 선생님같은 '모범생(-_-)' 스타일이 좋다더라'며 킥킥거렸습니다. 

과외둥이의 어머니도 소식을 들으셨는지 
과일을 깎아주시면서 '걔 어때요? 계속 만나기로 했다던데?' 하시며 
뜻모를 미소를 지어 보이셨습니다. 

그런데 왜였을까요. 

몇 번의 저녁과, 몇 번의 술자리를 갖고 나서 
저는 그녀의 의사와는 관계없었을지도 모를 결정을 내리고 
연락을 더 이상 하지 않았습니다. 

처음 만났을 때 제가 느꼈던 옅은 열등감과 
그녀 주변을 항상 감싸고 있던 자신감의 거리가 
당시에는 상당히 멀어 보였습니다. 

그녀를 만나면 나와 그녀, 그리고 둘 사이의 공기 보다는 
그녀와 세상, 그녀와 타인의 공기를 더 신경쓰고, 
나조차 나를 잃어버릴 것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렇게 외적 변수에 신경을 쓰느니, 
차라리 학교 벤치에 혼자 앉아서 
책이나 읽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시절, 그런 나이였죠. 





*2009년 3월 26일. 베이스볼파크 게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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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jyoo
2011/12/27 19:27





가을이 어찌나 귀해졌는지, 
요즘엔 하루하루가 아쉬워. 

아침에 자전거를 타고 정문에서 중도로 올라갈 때면
군대에서 다친 무릎이 시큰거리기 시작할 때도 아마 이맘 때였지.

중도 4열람실, 
시험기간을 제외하고는 거의 지정석이나 다름없었던 자리에 앉아
이미 곳곳에 포진한 익숙한 얼굴들과 무언의 인사를 나누고, 
자판기 커피 한 잔 뽑아 놓고 신문을 뒤적거리면서
이렇게 중심없이 공부하면 뭐가 되기나 할까, 매일 불안했었어.

시큰둥하게 두어 개의 수업을 듣고, 
금복식당에서 들큰한 제육볶음으로 점심을 먹고
산책삼아 고대 앞 사거리를 거쳐 쪽문으로 들어와서
학관 동아리방에서 후배들이 끄적거린 날적이 들춰보다가,

정대깡통에서 따뜻한 캔커피 하나씩 사 들고 
지금은 폐쇄된 대강당 앞에서 손바닥 데우면서
친구 녀석이랑 이런저런 얘기하던 오후에도 
딱 이런 날씨, 이런 공기였는데말야...

햇살이 비스듬히 쬐는 늦가을 오후에
민주광장을 가로질러 걷고 있으면
아이 손바닥만한 붉은 나무 잎파리들이
바람에 흔들려 서걱서걱 소리를 내곤 했지.

솔직히 전공책은 눈에 잘 들어오지 않았어.
베개로 쓰면 딱 좋을 상식책은 반도 외울 수 없었어.
어찌어찌 손에 남아 있는 건, 
몇 번을 읽어 누렇게 바랜 소설책 몇 권 뿐이었어.

하루가 쌓이면 뭐가 될지, 
한 달이 모이면 어디로 가는지, 
일 년이 지나면 어디에 있을지, 

취해서 터덜터덜 집에 갈 때면
길 건너편 헤드라이트에도 눈물이 났어.

그래도 뭐 어쩌랴 하던 계절이 
바로 이맘때였어.

시간이 어찌나 빨리 가는지,
요즘엔, 

하루하루가 아쉬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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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jyoo
2011/03/08 17:52

리안 감독의 영화는 개수대에서 끝내 사라지지 않는 끈질긴 머리카락 같다. 매번 치우고, 없애도 끈질기게 남아 있는데, 그게 내가 치운 그 녀석인지 아니면 새로 와서 걸린 녀석인지 확신하기가 어렵다. 그냥 스윽 보고 모른 척 지나쳐버리면 그만인 것을, 아침 나절의 바쁜 시간에 눈에 비친 그 '묘하게 처연한 머리카락이 낮에도, 퇴근길에도, 잠자리에 들 때도 끝내 뇌리에서 떠나지 않는다.

[와호장룡]을 보았을 때 그 머리카락은 푸르디 푸른 나무의 가지 끝을 밟고 바람처럼, 상념처럼 흔들리던 주윤발의 모습이었다. 영화의 전후 맥락과, 장쯔이의 철없음에 고생하던 양자경과 혈기왕성한 장첸은 곧 잊었어도, 이 세상 사람 같지 않은 무표정으로 먼 곳에 시선을 던지고 있던 무림 고수의 표정. '스노우캣'도 오마쥬 카툰을 그렸던 그 장면이 영화 [와호장룡]의 하이라이트였다.

리안 감독의 신작 영화가 [색, 계]라는, 발음이 쉽지만은 않은 제목을 갖고 있고, 베니스 영화제 황금사자상에 빛나며, 실제 상황으로 의심할 만한 섹스신이 그것도 꽤 길게 나온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지금까지 열거한 세 가지 팩트들로 나는 사실상 한 걸음씩 이 영화에서 멀어지고 있었다. 제목으로 현학적인 '그 무엇'에 반응하는 '평론쟁이'들을 끌어들이고, 영화제 수상 사실로 고상한 지성인 연(然)하는 관객을 모으고, 그도 저도 아니면 섹스신으로 '야동'을 능동적으로 즐기지 못하는 중년 부부나 성인 여성을 모으려는 게 아니냐는 생각에서다. 실제로 우리 나라에서 [색, 계]의 마케팅과 소개 기사는 이 세 가지 축으로 돌아갔으니, 내 짐작이 틀렸다고는 할 수 없지 않은가. 

그런데 나는 왜 이 영화를 봤을까. 안 봐도 되고, 그다지 보고 싶지도 않았던 영화를 끝내 보게 됐을까. 성적으로 '스트레이트'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선입견을 갖고 싶지 않아서 오히려 건너 뛰었던 [브로크백 마운틴](여전히 볼 생각이 없다)처럼, 그냥 넘기면 됐을 영화를 끝내 본 이유는 무엇인가. 그건 우연히 인터넷에서 본 트레일러 때문이었다.



 




 내가 모르고 있었던 건, 아니 미처 주목하지 못했던 건 이 영화가 1940년대의 상하이를 배경으로 하며, 일종의 '항일 저항 운동'을 다루고 있다는 기본적인 플롯이었다. 영화를 둘러싼 어떤 팩트들(난해한 제목, 베니스 영화제, 화끈한 섹스신)보다 관심이 가는 부분이 아닌가. 열강이 파이를 나눠 먹듯 조각조각 '조계'를 설정하고 그 땅에서 살던 수백만의 사람들을 거리 구석으로 꾸역꾸역 몰아내던 그 시대의 상하이...님 웨일즈가 만난 김산(물론 만난 건 옌안이었지만)과 조선인으로 중국 항일 영화의 황제에 오른 김염의 무대, 윤봉길의 홍커우 공원과 김구의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있던 곳, 그리고 장국영의 [상해탄]과 장동건의 [아나키스트](2000)의 배경...이런 저런 텍스트들을 통해 나는 1930,40년대의 지구상에서 상하이처럼 복잡하고 매력적이며, 슬프고 또 아픈 곳은 좀처럼 찾을 수 없을 거라고 짐작해 오던 터였다. 그런 시기의 그런 곳을 다룬 영화라면, 꼭 보고 넘어가야 했다.


영화를 보고 나서 만약 누군가가 이 영화를 거대하고 폭력적이며 잔인한 권력에 맞서는 순수하고 나약한 인간의 처절한 저항기로 읽는다면, 그 사람의 때묻지 않은 마음이 진지하게 부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1999년의 어느 날, 종로에서 [쉬리]를 보고, 대상이 누군지도 모르는 묘한 적개심과 위기감에 고개를 빳빳이 들고 종로에서 안암동까지 뚜벅뚜벅 걸어갔던 기억이 있는데, 그때의 내가 지금 이 영화를 봤다면 이 영화를 그렇게 판단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세상이 어디 그런가. 이 세상에 일백 퍼센트의 인간도, 일백 퍼센트 양쪽 사이드의 싸움도, 일백 퍼센트 원사이드의 갈등도 없다는 걸, 우리는 하루 하루 깨달으며 살아가고 있지 않은가.


피 한 방울 나올 것 같지 않은 냉혈한 '이 대장'도, 끓는 피 주저할 수 없어 항일 전선에 몸바쳐 뛰어든 왕치아즈도 인간이기에, 지긋지긋하게도 인간이기에 色에 이끌리고 戒에 몸을 사린다. 너의 욕망을 나는 경계하고, 나의 욕망은 네가 두려워하는, 그야말로 리얼한 관계. 거기에 끈적하게 얽혀 들어가는 정치와 이념은 오히려 등장인물들의 판단을 흐리게 하고, 결국 나중에는 뭐가 어떻게 되는 것이 옳은지 누구도 알지 못하는 상태가 되어 버린다. 왕치아즈의 손에 끼워져 있던 6캐럿의 다이아몬드 반지가, 그들 일당의 처형 명령서에 막 서명을 마친 '이'의 책상 위에서 딸깍거리며 흔들릴 때, 누가 옳고 그름을 말할 수 있는가. 정에 밀려 친일 반역자 '이'을 처리하지 못한 왕치아즈를 탓할 것인가, 끝까지 진심을 억누르며 반지 마저도 자기것이 아니라고 부인한 '이'의 냉혹함을 비난해야 하는가. 일본식 주점의 다다미방에서 왕치아즈가 부른 노래는, 그때 그녀를 잡은 '이'의 손길은 그들의 진심이었을까, '이'를 보석상 밖으로 도망치게 했던 왕치아즈는 결국 후회했을까, 왜 그녀는 잡히기 전에 독약을 삼키지 않았을까...


 '왕치아즈''가 차마 자살을 선택하지 못한 것은, 연극 동아리의 리더 '광유민'을 마지막으로 보고 싶어서였는지도 모른다. 또 '이'는 부하가 나간 뒤 다이아몬드 반지를 손에 쥐고 눈물을 흘렸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순정의 그 남자와 함께 총구 아래 허망하게 스러져 채석장 물웅덩이에 버려지든, 잠깐의 방황을 갈무리하고 성공을 향해 처절하게 '잘 나가'든, 그들 가운데 어느 누구도 승자는 아니다. 그들은 모두, 끝내는 나약하기 때문이다.


욕망과 경계가 얽힌 인생 자체가 참을 수 없이 끈적하다고 끊임없이 속삭이는 이 이야기의 승자는, 사실 조안 첸이 연기한 '이'의 부인이다.

'이' 부인은 본인이 원하든 그렇지 않든 승진을 거듭하는 남편이 있고, 멋대로 부리는 하인과 자동차가 늘 곁에 있다. 돈 많고 힘 있는 아줌마들을 모아 거액의 판돈이 오가는 마작으로 하루하루를 보내고, 홍콩에서는 상해 음식을, 상해에서는 고향 음식을 찾아 먹는다. 창가 가수를 불러 눈 앞에 앉혀 놓고 사치스럽게 노래를 듣고, 마작 친구들과 끊임없이 수다를 떤다. 그러나, '이 부인'의 가장 훌륭한 점은 욕망과 경계심의 사이를 왕복하며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는 '이'와 '왕치아즈'와는 달리, 끝내 흔들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마지막 장면에서 "누가 물으면 '막 부인은 갑자기 일이 생겨 홍콩으로 돌아갔다'고 답하라"는 남편의 말에, 아주 잠깐, 멈칫하고, 그걸로 끝이다. 이 부인은 그런 것쯤, 일상사처럼 넘길 수 있다. 다시 천박하지만 풍요한 일상으로, 아무렇지도 않은 듯 돌아가는 것이 진정한 '처세'이고 진짜 능력이라는 것을, 즉 강한 자가 살아남는 것이 아니라, 살아남는 자가 강하다는 것을 '이 부인'은 알고 있는 것이다.



(작성 : 200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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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1/31 13:45



1999년 12월. 제대 직후에는, 약간의 우울증 같은게 있었던 것 같다. 
애써 적응했던 군 생활을 '시간이 다 됐다'는 이유로 강제 종료당한 것이 
나름의 스트레스로 작용했을 듯.

학교에 가서 친구들을 만나고, 술 한잔 마시고 돌아오다가, 
오는 전철 안에서 마음이 공허해지고, 또 우울해 질 때는
당시 내가 살던 아파트 단지 초입, 상가 건물 4층에 있는 PC방에서 
새벽까지 시간을 보내곤 했다.

몇 가지의 게임을 하다가 그마저도 지겨워지면,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뮤직비디오를 보곤 했는데, 
그때 가장 많이 돌려봤던 뮤직비디오가 바로 이거였다.

원래부토 RPG는 즐기지도, 좋아하지도 않아서 
내용에는 통 관심이 없지만, 

둘 사이의 온갖 스펙타클한 과거가 감미로운 음악으로 이어지다가
우주적인 해피엔딩으로 마무리되는 이 뮤직비디오는, 
우울한 마음을 꽤나 위로해주는 역할을 했다. 

오래간만에 다시 들어봤다. 뭐 그때처럼 우울증 증세는 없지만, 
좋은 음악은 오래 기억에 남는다는 걸, 말하고 싶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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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1/27 10:37

 [눈먼 자들의 도시] -주제 사라마구(해냄,2008)

 

국민학교에 다니던 시절, 월요일 아침이면 전교생이 운동장에 모이는 '애국조회' 시간이 있었다.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하고, 애국가를 4절까지 부르고, 교내외의 무슨무슨 대회에서 상을 탄 아이들에게 시상식을 하고, 교장선생님의 훈화로 이어지는 조회는 대개 그 나이 또래 아이들이라면 누구나 좀이 쑤셔서 견디기 힘든 시간이었다. 다른 아이들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는 지금도 알 수 없지만 나는 지루해서 견딜 수 없을 때면 시선을 단상에 고정시킨 채 한 가지 상상을 즐겨 하곤 했다. 그 상상의 제목은 '만약 여기서 나 혼자 ***한다면'으로 시작되는 것이었다.

 

만약 여기서 나 혼자 쓰러진다면, 만약 여기서 나 혼자 투명인간이 된다면, 만약 여기서 나 혼자 스머프처럼 작아진다면, 거인처럼 커진다면...그런 상상 가운데 가장 짜릿하고 즐거워서 가장 많이 택했던 옵션은 '만약 여기서 나 혼자 공중으로 서서히 올라간다면' 이었다. 쓰러지는 건 어린 마음에도 너무 비극적이고, 투명인간이 되면 내가 투명인간이 됐는지 아무도 모를테니 재미가 없고, 거인이 된다면 아이들이 혼비백산할테고, 작아진다면 조회가 끝나고 밟혀버릴 가능성이 높다는 생각을 했지만, 알 수 없는 힘에 이끌려 서서히 공중으로 뜨는 상상은 그런 걱정이 필요 없었다. 물론 다시 현실세계로, 아이들의 키 높이로 내려오지 않으면 안된다는 불안감은 있었지만, 혼자 뜰 수 있다면 혼자 내려올 수도 있을 거라는 자신감이 있었다. 사실,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어차피 진짜로 공중에 뜨지는 못할 테니까.

 

이런저런 선택지 가운데 '공중부양'을 택한 것은, 그것이 가장 화려한 부러움을 살 수 있을 거라는 허영심을 자극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내 짝꿍 여자아이부터 모든 선생님과 친구들이 경이로운 눈으로 나를 보겠지. 어떤 아이들은 '조회시간에 공중에 떠오른 아이가 있다'고 집에 돌아가서 침을 튀기며 얘기할테고, 나는 이내 유명해지겠지. 아예 슈퍼맨처럼 자유롭게 날아다녔으면 좋겠다. 힘이 엄청나게 세지면, 그만큼 할 일이 많아질테니, 그냥 뜨기만 하면 딱 좋겠다...이런저런 상상을 하고 있으면 어느새 지루한 조회 시간이 훌쩍 지나가곤 했다. 그 시절에, 나는 '나만 공중에 뜬다는 것'이 두려운 일이 될 것이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공중에 뜨는 것은 조회라는 한정된 시간과 공간에서만 일어나는 기분좋은 놀이일 뿐, 공중에 뜬다는 사실이 나를 다른 방식으로 구속할 것이라는 이성적인 상상이 끼어들 자리는 없었다.

 

[가장 두려운 건, 오직 나만 볼 수 있다는 사실이다.]

 

주제 사라마구의 이 철학적인 소설의 표제는, '오직 나 혼자'라는 가정이 현실에서는 어떤 것인지를 직설적으로 제시한다. 소설은 '본다look'라는 행위에 기초한 우리의 사회, 관습, 예절, 인간성, 그리고 그 총체인 '문명'이라는 것이 그 기초를 잃었을 때 얼마나 처절하게 무너지는지를 극사실적으로 묘사한다. 선천적인 시각장애 때문에 출발점부터 시각을 제거당한 사람들을 제외한다면, 어느 날 아무 예고도 없이 갑자기 시각을 거세당한 인류에게, 지금까지 쌓아온 모든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 어느 교차로에서 출발신호를 기다리던 한 운전자가 시력을 잃으면서 전염병처럼 퍼져나가는 질병 앞에 문명의 껍질은 속절없이 사라지고, 오직 동물적인 생존 본능만이 아귀같이 남는다. 보지 못하게 된 사람들은 아직 볼 수 있는 사람들에 의해, 아직 볼 수 있는 사람들의 사회로부터 격리당하지만, 더 무서운 것은 보지 못하는 사람들 사이에 생겨난 궁극적인 착취와 폭력이다. 시각을 박탈당함과 동시에 그들은 자신들 내면의 인간성에 돌이킬 수 없는 파괴가 도래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강한 자가 약한 자를 때리고, 강간하고, 죽인다. 눈이 보이지 않지만 서로 의지하고 살 수 있을 거라는 몇몇 선한 이들의 소망은 그야말로 한낮 백일몽일 뿐이다. 선한 의지는 끝내 무시당하고, 조롱받는다. 인간은 결국 이렇게 잔인한 것인가. 아니, 작가는 잔인함은 그냥 거기 있는 실체일 뿐이고, 그걸 받아들이는 건 존엄을 지닌 존재라는 것을 보여주려는 것 같다. 존엄이 있는 존재의 잔인과, 존엄마저 잃은 존재의 잔인은 기실 인간과 짐승의 거리 만큼 떨어져 있다.

 

 누구든 항복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자를 내 손으로 죽여버리겠소. 왜요. 원을 그리고 앉은 사람들이 물었다. 우리가 살아가야 하는 이 지옥에서, 우리 스스로 지옥 가운데도 가장 지독한 지옥으로 만들어버린 이곳에서, 수치심이라는 것이 지금도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다면, 그것은 오로지 하이에나의 굴로 찾아가 그를 죽일 용기를 가졌던 사람 덕분이기 때문이오. 그 말이야 맞지만, 수치심이 우리에게 먹을 걸 주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누가 한 말인지 몰라도, 그 말은 맞소, 늘 수치심이 없어 배를 채울 수 있었던 자들이 있었소, 하지만 우리는 우리 분수에 맞지 않은 마지막 한 조각의 존엄성 외에는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소.이제 우리에게도 마땅히 우리 것이어야 하는 것을 찾기 위해 싸울 능력 정도는 있다는 것을 보여줍시다.(p.275)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설은 역시 희망을 그리고 있다. 전 인류를 통틀어 유일하게 앞을 볼 수 있는 의사의 아내와, 그녀 주변의 작은 커뮤니티는 시행착오를 통해 보이지 않는 삶과, 보이지 않는 자들을 도와주는 삶에 익숙해진다. 어릴 때 자주 하던 '장님 세상에서는 애꾸가 왕이다'라는 농담이 현실이 된 듯, 의사의 아내는 마음만 먹으면 눈이 보이지 않는 자들 사이에서 절대적인 능력을 행사할 수 있지만 작은 커뮤니티의 생존과 안정을 위해 그 노력을 희생할 뿐이다. 그래서, 모두가 다시 시력을 되찾았을 때 직감적으로 '이제 내 차례다'라며 자신만이 눈이 멀 것을 예상하고 받아들이며,  홀로 목격해 온 눈먼 자들의 죄악을 한 몸에 품고, 어두운 심연으로 홀로 가라앉는 그녀의 모습은 마치 성자를 연상시킨다. 소설은 이렇게 끝난다.

 

나는 우리가 눈이 멀었다가 다시 보게 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나는 우리가 처음부터 눈이 멀었고, 지금도 눈이 멀었다고 생각해요. 눈이 멀었지만 본다는 건가. 볼 수는 있지만 보지 않는 눈먼 사람들이라는 거죠. 의사의 아내는 일어나 창으로 갔다. 그녀는 쓰레기로 가득찬 거리, 그곳에서 소리를 지르며 노래부르는 사람들을 내려다 보았다. 이어 그녀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모든 것이 하얗게 보였다. 내 차례구나, 그녀는 생각했다. 두려움 때문에 그녀는 눈길을 얼른 아래로 돌렸다. 도시는 여전히 그곳에 있었다.(p.461) 

 

이 소설을 처음 접하는 사람은 이 글에서 인용된 부분만으로도  책장을 연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내가 느낀 당혹감의 일말을 엿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이 소설은 발화(發話)의 주체를 알기 쉽게 따옴표로 엮어서 보여주지 않는다. 대화가 시작될 때 따로 줄을 내려주지도 않는다. 처음 읽다 보면, 이게 누가 한 얘긴지, 누구에게 한 얘긴지, 실제 발화인지 등장인물의 상상인지 좀처럼 알아내기가 어렵다. 등장인물들이 말하는 모습을 쉽사리 그릴 수가 없다는 점에서, 작가는 소설을 읽는 독자에게도 일종의 시각 상실 체험을 제공하고 있다. 실제 상황이라면 목소리로라도 화자를 구분할 수 있다는 점에서, 독자에게 지워진 blindness의 굴레는 소설 속의 인물들보다 더 가혹하지만, 어차피 읽는다는 행위가 눈으로 활자를 쫓는다는 점에서는 양측이 처한 상황에 큰 차이가 없다. 마치 임사(臨死)체험처럼, 독특한 문체를 통해 독자들에게 임맹(臨盲)체험을 제공하는 작가의 배려(!)가 소설 후반부로 갈수록 불편함에서 감탄으로 바뀌어 간다. 대가(大家)라는 건 이런 작가를 두고 하는 말이리라.

 

작성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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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1/10 18:52



The Hands – 왕가위

이 영화는 한창 사스가 창궐하던 시기에 촬영됐다고 한다. 전염을 막기 위해 서로간의 불필요한 접촉을 피하고, 언제나 마스크와 하얀 장갑을 곁에 두고 있어야 했던 시기였기 때문에, 왕가위는 오히려 ‘접촉’에 관한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는 얘기.

그래서인지, 이 단편에서의 에로스는 촉각이다. 처음 만난 날 견습 재단사 샤오장을 애무하던 고급 창녀 후아의 농익은 손길. 관능적인 몸을 감싼 반투명 패브릭, 무늬가 수놓아진 옷감과 그 위에 눈물처럼 뿌려진 스팽글, 줄자 대신 창녀의 몸을 감싸 안는 재단사의 손, 닿을 수 없는 여인의 몸 대신 그 몸을 감싸는 옷의 촉감….

시각을 사로잡는 온갖 노골적인 사랑이 난무한 세상에서 둘의 사랑은 답답하고, 그래서 더욱 슬프다. 부둣가의 값싼 여관에서 이루어지는 쇠락한 창녀 후아와 재단사 샤오장의 마지막 장면은 말할 수 없는 처연함을 안겨준다. 병이 전염된다며 접촉을 피하는 후아를 어루만지고, 끌어안는 샤오장의 손길에 후아는 한없이 눈물을 흘릴 뿐이다.

남루하고, 지저분하지만, 5,60년대 홍콩의 풍경은 충분히 매력적이다. 햇살이 한 가득 들어오는 아파트의 넓은 창과, 파스텔톤의 인테리어, 나무의 삐걱거림과 질감이 느껴지는 오래된 여관…나는 왜 이런 풍경들에 묘하게 마음이 편해지는지 모르겠다.


Equilibrium - 스티븐 소더버그

하루키의 소설과 수필을 보면 가끔 사물의 '기원(origin)'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핀볼 머신의 진화부터 스니커즈에 얽힌 일화, 도넛의 발명(발견?)에 대한 이야기까지…[거의 모든 것의 역사]류의 잡학 사전에서 찾은 사실일 수 도 있고, 재치있게 꾸며낸 이야기일 수도 있는, 우리 주변에 흔히 있는 사물들의 작은 역사. 스티븐 소더버그가 하루키에게서 영감을 받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평정’이라는 제목의 이 이야기는 스누즈(snooze)기능이 추가된 알람 시계에 대한 소사(小史)를 다루고 있다.

1955년. 광고 기획자 닉은 ‘심슨’이라는 알람 시계 제조 업체의 광고 카피를 짜내기 위해 고민하다가 에로틱한 꿈을 꾼다. 온통 푸른 화면 속에서 아내가 아닌, 그러나 어디선가 본 듯한, 아름다운 여자가 자기 앞에서 샤워를 하고, 옷을 입고 외출하는 내용의 꿈. 그녀를 붙잡고 싶지만, 전화가 울리고, 전화를 받는 사이 그녀는 떠난다. 광고주를 만난 이후로 계속 같은 내용의 꿈을 꾸는 닉은 꿈 이야기를 아내에게 하고, 아내와의 관계는 급속히 식어버린다. 고민 끝에 정신과 의사를 찾은 닉. 정신과 의사는 일종의 수면 치료로 닉이 스스로의 꿈 속을 탐험하게 한 뒤, 에로틱한 닉의 꿈이 결국은 멋진 광고 카피를 만들어 내야 하는 스트레스에서 비롯된 것임을 깨닫게 하고, 그 스트레스에 대한 출구로 닉이 스누즈 기능을 생각해 내게 만든다.

(영화에는 구체적으로 묘사되어 있지 않지만) 틀림없이 닉은 스누즈 기능을 추가한 심슨의 알람 시계로 대 히트를 쳤을 것이다. 그리고 어느 날 아침(꿈을 제외하면 계속 모노톤이던 화면이 이제는 정상으로 돌아온다), 꿈 속의 여인이 결국 자신의 아내임을 깨닫는다.

왜 스누즈인가. 스누즈는 지금 해야 할 일을 일정한 시간 뒤로 미루는 ‘유예’이다. 전화를 받기 때문에 그녀를 떠나 보낼 수 밖에 없었다면, 전화 받는 행위를 잠시 미루면 되는 것처럼, 꿈과 현실 사이에서 즉각적인 선택을 강요하는 알람 시계의 폭력에는 스누즈 버튼으로 대응하는 것이다. 우선순위의 설정을 잠시나마 유예하고, 그 사이에 얻을 수 있는 잠깐의 자유. 결국 닉의 꿈 속의 에로스는 기발한 발명을 가능하게 한 창조적 암시였던 것이다.

그건 그렇고, 닉을 치료하는 정신과 의사는 닉 몰래 끊임없이 딴짓을 하는데, 그건 무슨 뜻일까? 그는 쌍안경으로 창 밖을 내다보고, 종이 비행기를 접어 날리며, 자신의 상담실을 제외한 바깥과 계속 소통하려 한다. 타인의 내면을 치료하는 정신과 의사라는 타이틀을 갖고 있지만, 그 역시 뭔가 불안하고 의뭉스럽다. 수면치료를 시작하기 전, 펜을 든 손을 떠는 의사와, 포갠 다리를 떠는 닉의 대칭적인 비교는, 어쩌면 의사 역시 같은 스트레스와 고민을 안고 있는 인간이라는 사실을 우회적으로 표현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The Dangerous Thread of Things -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

안토니오니에게 에로스는 좁은 곳에서 넓은 곳으로 이끄는 여울목인 듯 하다. 티격태격하며 별장을 떠난 연인-너무 오래 만나 이제 서로에게 서서히 지쳐가고, 섹스도 더 이상 새롭지 않다-이 무심코 차를 달려 닿은 곳은 기묘한 물가. 좁게 여울져 떨어지는 작은 폭포가 소(沼)를 이루고 있는 곳은 여자의 말대로 ‘많이 다녔으면서도 미처 깨닫지 못한’ 새로운 장소다. 그 폭포 옆 바위에서 그들을 맞이하던 두 나신은 그대로 ‘에로스’의 상징이다.

남자의 마세라티가 힘겹게 빠져 나가던 휴양지의 돌문과 여자친구와 함께 간 숲길. 또 다른 여인 린다가 사는 성 입구의 돌다리, 린다의 성 안을 미로처럼 엮어 놓은 복도는 현실의 비좁음을 상징한다. 기묘한 소(沼)를 지나친 연인은 여정의 곳곳에서 좁은 곳을 헤쳐 넓은 곳으로 나가는 경험을 한다. 린다의 성 꼭대기의 호젓한 풍경, 말들이 한가롭게 이동하던 클로이의 초원, 그리고 마지막 장면. 아무도 방해하지 않고, 자신의 몸으로 자유를 표현하던 그 해변까지. 결국 에로스는 일상의 좁은 협곡을 지나 환상의 평원으로 자신을 이끄는 열쇠 같은 것이다.

그런데 제목은 왜 이럴까. 환상을 동반하는 에로스가 결국은 사물 사이의 균형을 깨뜨릴 수도 있다는 암시일까? 사실 마지막 장면, 해변에서 전라의 두 여성이 서로를 보며 미소짓는 장면에서, 나는 안심하기보다는 위태로움을 느꼈다. 평화나 안식은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전혀 다른 양상으로 나타날 수도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작성 : 200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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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jyoo
2011/01/10 18:45





스토리가 탄탄해서 시종일관 눈을 뗄 수 없는 것도 아니고, 시끌벅적한 화면 때문에 보는 자체가 즐거운 것도 아닌데,

묘하게 집중이 된다. 이와이의 영화는.

열 여섯, 여자아이들의 세계, 있어본 적도 경험한 적도 없지만, 가만히 보고 있으면 이 아이들의 풍경 속 어디엔가 슬쩍슬쩍 지나가는 멍한 표정의 내 그림자가 보인다.

시간이 너무 많이 흘렀다고 멋대로 생각해 버린 탓에, 이제는 떠올리기조차 힘든 시절. 누군가 '좋아질 것 같은 사람'이 있고, 그 사람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는 친구녀석들이 있고, 주변에는 도대체 이해시키기 힘든 어른들이 울타리처럼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던 시절. 아무리 열심히 자라도 울타리를 뛰어넘을 수 없고, 결국은 갓 끼워 넣은 널빤지처럼 우리도 그저 평범한 울타리가 될 것만 같던 시절.

내 고등학교 1학년은 그랬던 것 같다.

이와이 슌지는 스스로 무거워지기를 거부한 것처럼 보이는데, 그게 참 잘 어울린다. 오랫동안 스스로 만들어온 자기만의 세계에서, 그는 정말 편안해 보인다. 그리고, 그 세계를 엿보는 나도 덕분에 덩달아 편안해졌다.

사진은 이 영화에서 아주 인상깊었던 장면. 종이컵으로 토슈즈를 만든 앨리스가 사진작가 앞에서 발레를 하는 모습이다. 마지막 동작의 느릿함에는 내 주변의 시간까지 멈추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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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jyoo
2011/01/10 18:12



9년 전, [비포 선라이즈]의 마지막 장면은 이런 것이었다고 기억한다.

비엔나 중앙역에서 제시와 셀린느가 헤어진 뒤, 하프시코드의 선율이 천천히 흐른다. 카메라는 전날 밤 그들이 함께 했던 공원과 강변, 골목과 다리, 유원지와 술집, 오래된 레코드점과 트램이 지나는 거리를 그들이 지나간 시간의 역순으로 하나 둘 비춰 나간다. 새벽을 맞은 각각의 장소들은 하룻밤의 일들을 조용히 묻고 새로운 하루를 시작한다. 사람들이 천천히 비엔나의 거리를 채우고, 헤어진 제시와 셀린느도 각자의 거리에서 각자의 삶을 채워 갈 것이다. 그들이 다시 만나게 될 지는 알 수 없지만, 그래도 지난 밤은 참으로 아름다웠다....

[비포 선라이즈]를 보고 제시와 셀린느가 다시 만나는 것이 좋은지, 그렇지 않은지를 고민해 보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나는 그들이 6개월 뒤 만나지 않는 게 좋겠다는 쪽이었다. 이유를 묻는 몇몇 지인들에게는 이렇게 얘기했었다.

처음 만날 때부터 곧 헤어질 것을 알고 있었기에 제시와 셀린느는 서로에게 그만큼 솔직하고 진지할 수 있었을 것이다. 약간의 치기와 '오버'도 오히려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생각하는 것이 가능했을 것이다. 다시 만나는 순간, 지난 여름의 흥분과, 낯선 도시의 유혹과, 달콤한 재치와, 두근거리는 감정이 가져오는 행복과 기쁨은 그것으로 끝이다. 만약에 정말 다시 만난다고 하면, 둘이 싸우건, 혹은 섹스를 하건 어느쪽이건 관객인 우리에게는 좋은 구경거리가 되겠지만 제시와 셀린느라는 두 유리알같은 남녀에게는 불행이다. 결국 서로가 서로에게 해 줄 수 있는 것은 서서히 조금씩 실망해 가며 결국에는 서로를 망가뜨리는 일 뿐일 테니까.

지금에 와서 보면, 나는 그때 '절반'만 맞았던 것 같다. 결국 그들은 6개월이 아닌 9년 뒤에 다시 만났기 때문이다.

가만히 내버려 두어도 사람은 누구나 나이를 먹는다. 스물 세 살이던 제시와 셀린느는 서른 두 살이 됐다. 제시는 미간에 흉터처럼 깊게 주름이 패인 베스트셀러 작가가 됐고, 셀린느는 볼살이 쪽 빠진 환경운동가가 됐다. 제시는 대학에서 만난 여자와 결혼해 가장이 됐고, 셀린느는 짧은 사랑을 반복하며 여전히 혼자다.

물론 우연은 아니겠지만, 제시의 출세작은 셀린느와의 만남을 다룬 소설이다. 9년 전의 만남은 제시에게도, 셀린느에게도 깊은 영향을 주었겠지만, 아무래도 배낭여행으로 유럽까지 건너온 제시 쪽의 임팩트가 더 컸을 것이다. 게다가 [비포 선라이즈]의 대화에서도 알 수 있듯이 제시는 현실주의자인 척하는 로맨티스트다. 기억을 채색하고 풀어놓는데는 '선수'인 것이다. 영화 속에서만 존재하는 책이기에 읽을 수는 없었지만 아마도 제시의 책은 영화 속의 '사실'보다는 훨씬 더 미화되고 과장됐을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다. (제시를 탓하는 것이 아니다. 소설이란 그런 측면이 있는 것이 당연하지 않은가.)

9년 전의 비엔나와 이번의 파리. 비엔나는 제시와 셀린느 둘 다 스쳐가는 곳이었다면 파리는 셀린느에게는 일상이다. (그래서 이번엔 제시보다는 셀린느가 주연에 가깝다.) 그래서일까, 셀린느는 더 많이 얘기하고, 더 많이 감정적이다. 제시의 기사 딸린 렌터카 안에서의 셀린느는 가만히 봐 주기가 민망할 정도로 히스테리컬하다. 9년 전의 똑 소리나게 당당하면서도 따뜻하던 셀린느에서 많이 멀어진 듯한 느낌. 그러나 당연히 미워할 수 없다.

화두는 음악이다. [비포 선셋]의 처음부터 마지막 장면에 이르기까지, 음악이 나왔던가? 좀처럼 기억이 나지 않는 것으로 미뤄, 아예 없었거나, 있었어도 전혀 인상적이지 않았던 것 같다. 오래된 레코드샵에서 제시와 셀린느가 들었던 [come here]나 앞서 얘기한 하프시코드 연주곡의 여운이 아직도 남아 있는 [비포 선라이즈]에 비하면 리차드 링클레이터는 이번 영화에서 음악을 지나칠 정도로 절제했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순간, 제시를 집으로 데려온 셀린느가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부른다. 리듬은 가벼운 왈츠, 멜로디도 평온하지만, 내용은 9년 전의 제시를 그리워하는 애절하기 짝이 없는 곡이다. 이 한 곡을 위해서 링클레이터는 영화의 전체에 음악을 부각시키지 않았던 것이다.

노래 때문인지, 아니면 제시가 9년 전과는 다르게 얘기를 많이 하지 않아서인지, 세월은 셀린느에게 더 많이 흐른 것 같다. 그 세월이 모두 고통은 아니었을지라도, 제시를 다시 만난 셀린느는 그때 비엔나에 다시 가지 않은 것을-어쩔 수 없었다지만-이제서야 후회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물론 제시도 약속의 날 비엔나에 나타나지 않은 셀린느를 원망하며 3년이 넘는 시간동안 그 하룻밤을 머리속에서 끊임없이 복기했겠지만, 소설을 탈고하는 순간, 제시의 기억은 그날 밤 있는 그대로의 기억에서 분리돼 '추억'으로 동결됐을 것이다. 그렇기에 제시는 다시 만난 셀린느 앞에서 조금 더 어른이 된 척 할 수 있었을 것이다.

마지막 장면, 재즈 여가수의 흉내를 내며 제시에게 뉴욕행 비행기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상기시키고, 조용히 웃으며 페이드 아웃되는 셀린느의 모습이, 그토록 쓸쓸하게 느껴지는 것은 왜일까. 그러면서도, 끝내 제시와 셀린느가 작별하는 장면을 보여주지 않은 링클레이터의 의도는, [비포 선라이즈]-[비포 선셋]을 잇는 트릴로지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일까, 아니면 순수하게, 마치 [비포 선라이즈]의 마지막처럼 관객에게 모든 가능성을 열어주는 생각의 자리를 마련해 주기 위한 것일까.

나는 이번에는 '다음'을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everything is possible. 어떤 결론을 내리건, 나도 [비포 선라이즈]를 보고 가슴 설레며 나름의 스토리를 만들어 가던 그때의 나로부터 9년을 살아온 것이다. 그리고 나의 풍경 속에서 나의 인생을 채워가야 하는 '의무'가 있는 것이다. 뉴요커 소설가 제시와, 파리지엔느 환경운동가 셀린느처럼 말이다.

(작성 : 200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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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jyo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