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와 함께 일주일 여정으로 프랑스에 다녀왔다.
처음 닷새는 파리에서 여느 관광객들처럼 관광명소를 돌아다녔다. 샹젤리제와 개선문, 사이요궁과 에펠탑, 베르사이유 궁전과 오르세 미술관, 몽마르트 언덕과 노트르담 성당, 마레 지구와 뤽상부르 공원…비록 좀처럼 얼굴을 보이지 않던 태양과, 지나치게 자주 찾아오던 비바람, 그리고 프랑스 현지에서도 말이 많았던 이상 저온현상으로 기대했던 만큼 기분을 내지는 못했지만 아내와 나는 동양에서 온 흔한 관광객으로 파리를 꽤나 즐겼다. 적당한 쇼핑과 카페놀이도 포함해서.
그리고 마지막 이틀은 동남부 몽블랑 근처에 자리잡은 그르노블Grenoble로 이동해 그곳 대학에서 공부하는 회사 선배를 만났다. 오래간만에 만나 회포를 풀고, 저녁을 함께 먹고, 호텔에서 하루 쉰 뒤에 마지막으로 앙시Annecy를 둘러본 뒤 출국할 예정이었다. 그르노블에서 벌써 몇년 째 자리를 잡고 공부하고 있던 선배 덕에 알찬 시내 관광을 마치고 그 지역 음식 퐁듀로 저녁을 배불리 먹은 뒤 숙소에서 푹 쉬고 나온 날-그러니까 앙시로 이동하기로 한 날, 그르노블 기차역에서 만난 선배가 우리에게 이런 제안을 던지기 전까지, 우리는 누가 뭐래도 앙시로 가서 물 맑기로 유명하다는 호수를 산책하고, 아주 조용히 둘만의 휴가 마지막을 즐기려던 참이었다.
"오늘 노동절이라 어딜 가도 다 쉴텐데, 앙시에서 뭐할래? 호수 보는 거 말고는 할 게 없을텐데?"
"그래도 일단 가기로 했고, 기차표며 호텔 예약까지 다 했는데요…."
"기차 예약이야 취소하면 되고, 호텔도 마찬가지 아냐?"
"에이, 그래도 선배 부담되니까…."
"그러지 말고 생각 다시 해봐. 내 친구네 집이 완전 시골인데, 나도 가끔 놀러가거든? 거기 안갈래? 자고 내일 바로 출발해."
알고보니, 선배는 이미 우리 부부를 친구-이름은 에릭-집으로 데려가기로 해 놓고 친구와 말을 맞춰놓고 있었다. 선배가 그르노블 역에 온 건 우리를 환송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제안을 하기 위해서였고, 노동절을 맞아 버스며 트램tram이 모두 운행을 중단하는 바람에 선배를 역에 데리고 온 것도 다름아닌 에릭-과 그의 오래된 시트로엥 자동차-였다.
그럼, 못이기는 척.
호텔은 부킹닷컴booking.com을 통해 최저가로 예약을 마친 터라 환불과 변경을 할 수 없는 조건이었기 때문에 과감히 포기했다. 그르노블 역에서 앙시행 TER 기차표를 취소하고, 짐을 모두 에릭의 자동차 트렁크에 실었다. 선배의 자취방에 잠시 들러 간단한 음식물을 챙겨 차로 20분 정도 거리에 있다는 에릭의 집으로 향했다. 동네 이름은 '생 뽈 드 바르스St. Paul de Varces'였다.

이렇게 해서 얻어 탄 에릭의 자동차. 원래 뒷좌석은 겨우내내 에릭의 집에서 기르는 말-이름은 휴디-가 먹을 건초를 근처 목장에서 사다 나르느라 지푸라기 투성이였다. 에릭은 "This is French life."라면서 약간 미안한 듯 얘기했지만, 어디가나 부담을 주기 일쑤인 여행객에게 그런 사과는 필요없었다. 그르노블 인근 고등학교에서 프랑스어와 역사지리를 가르치는 교사인 에릭은 한국에서 프랑스인 가정으로 입양된 30대 초반의 남자. 큰 덩치에 안 어울리는 수줍은 미소와 조금 어색한 영어가 어딘지 모르게 우리 마음을 편하게 했다. 나이 차이가 좀 나는 선배와도 친해 보여서 안심했다.
그르노블 시내를 벗어나자 에릭은 빠른 고속도로 대신 시골길로 차를 달렸다. 동네 사람들이 '벨 돈belle donne'이라고 부르는 거대한 산맥-이 산맥의 끝자락에는 유명한 몽블랑이 있다-이 시원하게 펼쳐진 광경을 볼 수 있는 소박한 길이었다. 에릭은 중간에 잠시 차를 멈추고 차창 밖 광경에 정신이 팔려 있는 여행객들에게 사진을 찍을 시간을 주는 배려도 잊지 않았다.

파리에서도 보지 못했던 화창하기 그지없는 날씨. 노동절 휴일의 마지막을 아쉬워하기라도 하듯, 시골길 하이킹에 여념이 없는 동네 주민.

3시방향으로 고개를 돌리면 저 멀리 구름에 정상이 살짝 가리워진 '벨 돈'이 시야에 가득찬다. 몽블랑은 멀어서 보이지 않지만 아직도 정상 근처는 만년설로 하얗게 반짝인다. 그르노블 인근에서는 고개만 돌리면 벨 돈을 볼 수 있다.
가던 길을 마저 재촉해 생 뽈 드 바르스 마을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에릭의 집에 도착. 에릭의 동거인은 예순이 넘은, 그러나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을만큼 정력적인 그의 어머니 아닉Annick이다. 그리고 앞서 언급한 말 휴디와 고양이 다섯 마리, 개가 다섯 마리, 셀 수 없는 비둘기-우리나라와는 달리 웬만한 방 하나 크기의 새장에서 기른다-까지 에릭네와 함께 산다.

에릭네 집 전경. 지붕 한 가운데 뚫린 창 안쪽이 에릭의 동생-지금은 다른 곳에 살고 있다고 한다-로라의 2층 방이고, 우리는 저 방에서 하룻밤 신세를 졌다.

배낭에서 꺼낸 과자를 우걱우걱 씹어 먹던 휴디. 당나귀는 아닌 것 같은데, 말 치고는 작은 종인가보다. 나이는 열 살이 넘었다고 한다.

개들의 경계도 잠시. 오스트레일리안 셰퍼드인 '샤흐디'는 어느새 발치에 다가와 쓰다듬어달라고 애교를 부린다.

이녀석은 다소 산만하지만 역시 사람을 잘 따르는 꺄라이브. 개들이 일단 큼직큼직하니 만지는 손맛(?)이 있고, '어이구 이녀석!'하면서 툭툭 쳐도 오히려 더 좋아한다.

늑대를 닮긴 했지만 다리가 많이 짧은 이녀석의 이름은 질리였나? 사진은 좀 무서운데, 순하기는 마찬가지. 장난이 가득한 표정이다.

아닉 아주머니와 함께 비둘기 새장으로 먹이를 주러 간다. 개들이 큰 엉덩이를 흔들며 앞서거니 뒤서거니 한다.

경계의 눈초리를 보내던 이 집의 왕초 고양이. 그래도 사람 손을 거부하지는 않더라.

갑작스러운 에릭의 제안이었을텐데도 먼 곳에서 온 우리를 반갑게 맞아준 아닉 아주머니가 이런저런 마실 거리를 꺼내 마당의 식탁에 놓아주셨다. 아주머니는 프랑스어 외에 간단한 영어를 할 줄 아셔서 단어 몇 개로 우리와 대화하는데에는 큰 지장이 없었다.


아닉 아주머니는 집 주변을 참 예쁘게 가꾸어 놓았다. 소박한 풍경이지만, 곳곳에 꼼꼼한 관리의 손길이 느껴졌다.
아닉 아주머니는 물론 개, 고양이들과 잠시 친해진 뒤 선배와 우리 부부는 뒷산 산책길에 나섰다. 에릭은 다음 날 수업 준비를 해야 해서 따라가지 못하겠다며 또 특유의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오히려 우리가 미안했다.
마침 5월 1일은 프랑스에서는 물방울꽃 축제fête du muguet의 날이라고 한다. 삼삼오오 가족과 함께 생 뽈 드 바르스의 뒷산을 찾은 동네 사람들이 하얀 물방울꽃을 저마다 손에 들고 휴일을 즐기고 있었다. 뒷산이라고는 해도 바위가 툭툭 튀어나온 꼭대기는 꽤 높아 서늘한 광경을 연출했는데,

이런 뒷산에,

이런 숲이 울창하고,

이런 산길이 고즈넉하게 이어지고 있었다.
가볍게 땀이 날 정도로 산책을 하고, 작은 개울 옆으로 난 길을 따라 다시 내려왔다. 중간에 개울을 건널 때에는 이끼가 낀 바위가 미끄러워 잠시 고생을 했으나 다행히 넘어지거나 풍덩 빠지지는 않았다. 약간의 어드벤처를 뒤로 하고 다시 마을로.

오후 늦게 다음날 수업준비를 마친-틀림없이 후다닥 해치우지 않았을까-에릭과 함께 근처의 조금 큰 마을 바르스Varces에 갔다. 마을을 굽어보는 언덕에 오래된 성당이 있고, 성당을 돌아 오르는 언덕길 오른쪽에는 마을 사람들의 묘지가 있었다. 언덕 정상에는 바르스 마을 전체를 굽어보는 투박한 성모상이 자리잡고 있었다.
휴일인 탓도 있었겠지만, 마을 전체는 늦은 오후의 정적과 평화로 가득했다. 시간도 분위기를 맞추려는 듯 덩달아 느릿느릿 산등성이를 넘어가고 작은 새의 지저귐과 여울을 흐르는 맑은 물소리만이 배경음으로 낮게 깔렸다. 산에서 마을로 내리 깔리는 공기는 서늘하고 달콤했고, 어딘가 모르게 물기를 가득 머금은 바람 냄새가 났다.

바르스 마을의 오래된 성당.

성당을 오르는 작은 길. 바닥은 시멘트로 깔고, 손잡이도 만들었지만 벽은 예전 그대로인 듯.

성당 앞 공터에서 만난 포토제닉 고양이.

성당 지붕 너머로 보이는 바르스 마을의 뒷산.

동산 꼭대기에서 내려다 본 바르스 마을. 에릭은 이 마을에 있는 초등학교를 다녔다고 한다.

그리고, 마을을 내려다보는 성모상. 층층이 석재를 쌓아 올린 뒤 조각을 해서 '유적'이라고는 하기 어렵지만, 특유의 소박함이 잘 묻어나는 성모상이다. 유명 관광지에서 보는 매끈한 대리석 성모상보다 오히려 더 마음을 잡아 끄는 데가 있다.
바르스 마을에 오게 될 줄은, 바로 전날까지만 해도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우리가 아닌가. 아무런 계획도, 사전 준비도 없이 흘러가는 하루가 보통의 여행에서라면 꽤나 불안하고 답답했겠지만 눈앞에 자분자분 드러나는 프랑스 시골마을의 풍경은 그런 걱정을 상쇄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어쩌면 진정한 여행이란 기차 시간표와 기념품 상점이 아니라, 이런 작은 길 모퉁이와 개울가, 문득 눈이 닿은 풍경 속에서 조용히 자기를 알아봐 줄 사람을 기다리고 있는 존재인지도 모른다.




해가 뉘엿뉘엿 산을 넘어가면서 아주 조용히 어둠이 찾아오고 있었다. 우리는 집으로 다시 돌아와 저녁준비를 시작했다. 요리는 에릭이 만들었고 나와 아내, 선배는 지하 식료품 창고에서 가져온 양파와 마늘, 올리브와 레몬을 적당히 자르고 썰어 그를 도왔다. 아닉 아주머니는 새 냅킨을 꺼내고 샴페인을 준비하고 식기를 정돈했다. 모두가 조금씩 도와가며 함께 저녁을 준비하는 사이, 개와 고양이들은 놀아주지 않는 사람들이 야속했는지, 아니면 원래 저녁시간이면 그렇게 하는지 식탁 테이블 아래, 거실 소파 위, 혹은 어디든 정해진 자기의 자리에서 잠시 휴식을 취했다.

채소를 볶고, 계란을 삶으며 요리 삼매경에 빠진 에릭과,

놀아 주는 사람이 없어, 갑자기 심심해진 개들.

시크하기 이를 데 없는 고양이 미시시피의 증명사진급 표정. 뒤는 테이블 세팅중인 아내.

모험심 강한 '빌리'는 이미 밤 마실 채비를 마치고 창문 밖에서 대기중이다.


맛있는 저녁식사. 샐러드도, 요리도 모두 신선하고 맛있었다. 샴페인을 살짝 걸치고, 거기에 꺄시스cassis(블랙커런트)로 만든 술을 타서 마셨다.

라비올리ravioli와 곁들인 이 요리는 볶은 야채와 생선살을 함께 익혀 레몬즙으로 간을 했다. 에릭은 레몬이 너무 많이 들어가서 조금 쓴 맛이 난다며 부끄러워했지만, 우리는 아주 맛있게 먹었다. 뒤에 꺄시스를 섞은 샴페인은 거의 비워졌다.

미리 치밀하게 섭외를 해도 이렇게 즐겁게 보내기 어려웠을 하루를 우리에게 선사한 아닉 아주머니와 에릭. 그리고 소박한 프랑스 농가 모습 그대로 간직한 그들의 멋진 집. 이들에게, 또 이들을 소개해 준 선배에게 어떤 감사의 말을 해도 모자랄 것 같다.
다음날은 비가 왔다. 우리는 새벽 4시 반에 일어나, 에릭의 차로 그르노블 역에 이동해 리옹Lyon역까지 TER로, 리옹역에서 샤를 드 골 공항까지 TGV로 이동한 뒤 오후 1시 35분에 이륙하는 에어프랑스를 타고 귀국했다. 만약 처음의 계획대로 앙시에 갔더라면 왠지 조금 아쉽게 끝났을지도 모를 프랑스 휴가, 그 마지막에 우연과 호의가 겹친 행운 가득한 경험이 있었기에 이번 프랑스 여행은 오래도록 기억될 것 같다.
마지막으로 그 새벽, 에릭의 차를 타고 역으로 이동하는 도로 안에서 삐걱대는 와이퍼 소리와 함께 듣던 음악. 아직 덜 깬 새벽잠과, 휴가의 마지막이라는 생각에 다소 우울했던 마음을 가만히 어루만지던 Al Green의 Let's stay together. 한국에 도착해서 정확히 일주일 만큼의 먼지를 뒤집어 쓴 차를 공항 주차장에서부터 몰고 집으로 오는 아침에 아이폰을 카오디오에 연결해 멜론 스트리밍으로 다시 들었지만, 바로 하루 전의 그 느낌은 더이상 찾아볼 수 없었다.
역시나, 서울은 소음으로 가득하다. 싫고 좋고를 떠나, 그냥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