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03/15 16:16



어느 분의 그림인지 모르겠습니다. 문제가 된다면 삭제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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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jyoo
2012/03/13 20:10

(사회당 덕후위원회의 '코나타기'/출처 : 네이버, 아니 루리웹)
*코나타는 '럭키☆스타'의 이즈미 코나타*



어젯밤에 아내랑 와인 한 병 까고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가 예전 사회당에 '덕후위원회'라는 게 있었다는 걸 알았다. 아마 '정당투표는 진보신당 줄까?' 하는 주제의 얘기를 하다가, '근데 진보신당은 사회당이랑 통합했는데 뭐가 좀 변한 게 있나?'하는 얘기로 발전한 뒤 홍세화 대표와 박노자 교수 얘기가 잠시 나왔다가, 그 김에 문득 아이폰 켜서 검색해 본 결과에 우연히 얻어 걸린 듯하다. 

이익집단의 정치참여는 민주주의가 가동하는 근본적 동력 가운데 하나다. 덕후가 스스로 정치세력화해서 자집단의 이익을 주장하며 정치를 한다는 것에는 하등 반대할 이유가 없다는 거다. 다만,  그 '이익'이 남보기가 좀 뭣해서 그랬는지 어쨌는지, 아무튼 덕후위원회는 몰락했다고 한다. (굳이 그럴 필요까지야 있었을까, 싶지만.)

사회당 덕후위원회와 관련해 구체적인 건 네이버에서 검색하면 나온다.  (검색결과 클릭)

뭐, 아무튼 '덕후 위원회'의 존재도 알았겠다, 덕후들이 정치세력화를 고민까지 한 이 개명세상에 엄연한 선거권을 가진 한 명의 '민주 시민'으로서 내가 '아, 이거 좀 정치력으로 해결해 줬으면…'하는 것이 뭔지를 가만히 생각해 봤다. 

아참, 아내와 술상을 벌려놓기 전에 나는 사실 TV를 좀 봤다. 늦은 저녁을 먹고 문득 보고 싶어져서 미국 드라마 The West Wing S01_01을 DVD로 봤고, 그 뒤에는 차인표가 나오는 '힐링캠프'를 잠시 봤다. 웨스트윙은 90년대 드라마여서 DVD의 화질도 최신 미드에 비하면 많이 딸렸다. 힐링캠프에는 차인표의 예전 드라마 출연 장면이 몇 번이고 반복됐는데, 역시 지금의 기준으로는 화질이 좋지 않은 편이었다. 

그래서였을까. 은근히 술기운도 좀 오른 김에 아이폰 메모장에 끄적거린 단어는 '고해상도 정치연대'였다. 여덟 글자를 쓰는 사이 술기운이 더 올랐는지 영어로 'HD solidarity'라고 친절하게 국제화까지 고민한 흔적도 고스란히 남았다. (작성 시간 봐라, 가관이다...)




(그런데 이제 와서 생각해보니 HD-High Definition-은 '고화질'이다. 해상도는 레졸루션resolution으로 쓰니 '고해상도'라면 High Resolution이 맞는거다. 영어로 끄적거린 메모 내용은 한 마디로 틀렸다는 얘기.)

아무튼, 나는 '고해상도 정치연대'가 '고화질 연대' 보다는 어감상 더 좋다는 입장이므로, 이를 기준으로 뻘생각을 점점 넓혀본다. 네이버 백과사전에서 '해상도'를 검색(결과 클릭)하고 읽어가다보면 이런 부분이 나온다. 

모니터 해상도는 한 화면에 픽셀이 몇 개나 포함되어 있는지를 말하는 것으로, 대개 가로의 픽셀 수와 세로의 픽셀 수를 곱하기 형태로 나타낸다. 곧, 1,024×768는 가로 1,024개, 세로 768개의 픽셀로 모니터에 나타낸다는 표시이다. 같은 해상도라도 크기가 작은 모니터에서 더 선명하고, 큰 모니터로 갈수록 면적이 넓어지므로 선명도가 떨어지게 되는 것이다.


옳거니!

같은 해상도라도 크기가 작은 모니터에서 선명하다. 큰 모니터로 갈수록 면적이 넓어지므로 선명도가 떨어진다. 해상도는 고정돼 있다는 것이 전제이므로, 그렇다면 "사회의 선명도를 높이기 위해 고정돼 있는 해상도를 더욱 높여야 한다"는 주장이 가능하다.
따라서 '고해상도'는 다름아닌 사회의 선명도를 더욱 높이기 위한 방법론을 의미한다.정치권은 '고해상도'를 외치는 우리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라! 우리에게 '고해상도 정치연대'를 허하랏!

하이 레졸루션의 정신은 딴 거 없다. 눈이 시리도록 선명한 정치, 그것 뿐이다. 음습한 밀실에서의 공천과, 권력 나눠먹기를 목적으로 하는 야합은 일절 필요없다. 하이 레졸루션의 깃발 아래, 훌륭한 정치는 물론 뻘짓마저도 선명하게 하기를 바란다. 그리하여 행위자도, 추종자도, 반대자도 모두 각자의 목적을 선명하게 정치판에 투사하도록 하는 것이 바로 '고해상도 정치연대'의 궁극적 목적이다.

'고해상도 정치연대'의 깃발로는, 형평성을 고려해 '고해상도'를 구글 '이미지'로 검색했을 때의 첫 사진으로 정하기로 한다. 바로 이거다. 불만은 없으리라 본다.





잇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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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jyoo
2012/03/08 16:17
네이버 엔드라이브에 들어가보니 예전에 아이폰으로 찍어둔 사진들이 가득했다. 언제 여기다 옮겨놓았을까. 
그중에 몇 장을 다운로드받아서 블로그에 올린다.

사진은 주로 2009년, 2010년에 광화문 정부청사 출입하던 시절 자동차로 회사에 돌아오면서 찍었다. 
구름이 아름답던 오후의 하늘이 많다. 



이건 미사리 근처에서 찍은 사진. 군인들이 참가한 스카이다이빙 대회였던 걸로 기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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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jyoo
2012/03/08 14:01



포스 작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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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jyoo
2012/03/07 17:26




사실상 명작 반열에 올랐다고 생각하는 일본드라마 야마토 나데시코(2000, 후지TV)의 명대사. 
이게 왜 명대사인지는 설명이 좀 필요한데...

남자 주인공(사진의 남자, 츠츠미 신이치)은 보스톤에서 수학을 전공한 천재지만 생선가게를 운영하던 아버지가 갑자기 돌아가시면서 가업을 이어받고 건강이 좋지 않은 어머니를 보살펴드리기 위해 학자로서의 창창한 미래를 포기하고 생선을 파는 남자.
 
여자 주인공(사진의 여자, 마츠시마 나나코)는 가난한 어릴적의 기억을 뒤로하고 고향을 등진 뒤 자수성가해, 엄청난 부자를 만나 결혼해 유복한 생활을 꿈꾸는 속물 스튜어디스. 

둘은 우연히 친구들이 주선한 미팅에서 만나는데, 남자의 재력과 신분을 여자가 오해하면서 잠시 훈훈한 분위기가 이어지다가, 여자가 남자의 가난을 알고 매정하게 차버리는데…  

그러다가, 남자의 대학시절 친구 오카모토가 결혼을 해서 남자는 피로연에 참석하고, 여자도 어떤 인연으로 같은 자리에 오게 되는데, 여기서 남자가 인상적인 피로연 연설을 하는 것이 바로 위의 내용. 

사실 이 장면에서 마츠시마 나나코의 표정과 연기가 참 좋은게, 자기가 한 번 차버린 남자지만 인간으로서 남자를 다시 한 번 '좋은 사람'으로 바라보게 되는 복잡한 심경을 잘 표현하고 있다는 것. 다시 말해, 부(wealth)가 중요하다고 늘 말하고 다니고, 주변 사람들도 모두 '얘는 그런 애야'라고 생각해버리지만, 진짜 속마음은 재산과는 관계없이 자기를 정신적으로 고양시키고 안정시켜줄 사람을 찾는 평범한 사람이라는 게 표정에 잘 녹아 있다는 것. 






인터넷에서 돌아다니다가 그리운 대사를 만나 가져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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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jyoo
2012/03/05 19:19



소설을 읽고 기사를 고민하다
 

팟캐스트 <김영하의 책읽는 시간>으로 친숙한 작가 김영하가 새 장편을 냈다. 지난 해 초 김영하가 시나리오 작가 최고은씨의 죽음과 관련된 논쟁으로 트위터를 그만두면서부터 나는 오히려 이 작가에 새삼 관심을 갖게 됐다. 팟캐스트에서 그가 소개한 책을 하나 둘씩 사 모으고, 그가 직접 쓴 소설을 하나 둘씩 읽어가면서 다소 건조하고 무심한 문체와 치밀한 취재, 그리고 무엇보다 사회에 대한 호기심을 꾸준히 유지하며 나름의 소설세계를 확고하게 넓혀가고 있는 그에게 무언의 지지를 보내게 됐다. 아내가 <빛의 제국>을 읽는 사이에 신작에 대한 정보를 보고, 예약구매로 손에 넣어서 지난 주말에 읽었다. 제목은 <너의 목소리가 들려>.

책을 만지작거리면서 펼치지는 않고 있다가, 중앙일보 토요일자에 실린 신간 소개와 작가의 인터뷰 기사(클릭)를 먼저 읽고 말았다. 대개 책 대신 소개 기사를 먼저 읽고 나면 독서 자체는 '망쳤다'는 생각으로 끝나기가 쉬운데, 막상 책을 다 읽은 뒤에도 그런 생각은 들지 않았다. 작가가 설명하는 자신의 소설과, 내가 읽은 소설이 사뭇 다른 느낌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노 오펜스.

먼저 신간 소개 기사를 인용한다. 대강의 내용은 이걸로 파악할 수 있다. 

주인공 제이는 탄생과 동시에 버려진 고아다. 길고양이마냥 험난한 노숙 생활을 하며, 사회로부터 버림 받은 또래들과 어울린다. 스스로 고아이기를 택한 동규는 제이와 운명을 결탁한 인물이다. 한때 함구증(緘口症)을 앓았는데, 제이는 그런 동규의 속내를 읽어냈다. 훗날 목소리를 회복한 동규는 제이의 길바닥 인생에 합류한다. 제이는 폭력적인 사회에 폭력으로 맞선다. 동규를 비롯한 고아들의 우두머리가 된다. 그들이 잃어버린 사회적 목소리를 대신 외치고 싶었던 게다.

 

다음은 기자의 e메일 질문에 대한 작가의 답변이다. 질문은 굵은 글씨.

-고아가 주인공으로 자주 등장한다.
"내가 가장 사랑했던 주인공들이 대부분 고아다. 『검은 꽃』의 이정, 『퀴즈쇼』의 민수가 그랬다. 『빛의 제국』의 기영 역시 낯선 땅에서 스스로 습득한 규칙과 정보에 따라 살아간다는 점에서 다르지 않다."

-정신적 고아들에 대한 관심인가.
"작가와 작품의 관계는 산책을 나간 개와 주인과 비슷하다. 때로는 개(작품)가, 때로는 주인(작가)이 앞선다. 정신적 고아들이 등장하는 소설들은 내가 의식하지 못한 가운데 나를 끌고 여기까지 왔다."

-어떻게 구상한 소설인가.
"5년 전쯤 90년대에 태어나 2000년대에 생을 마감한 한 소년의 이미지가 떠올랐다. 정신의 사각지대에 있는 소년과 그가 보냈을 시간에 대해 생각하게 됐다. 그리고 취재에 나서자 실제로 그런 소년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내가 주목한 것은 작가의 '성실함'이랄까, '직업정신'이랄까, 그런 거다. e메일 답변에서 작가가 "취재에 나서자 실제로 그런 소년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고 언급한 부분이, 실은 소설의 전부다. 소설의 장면 장면이 신문 사회면의 기사에서 한 번쯤은 다뤄졌을 만한 내용이고, 작가는 그 사건과 사건을 주인공들의 이야기로 엮어낸다. 사건 사이의 공백은 작가의 상상으로 메워진다. 상상이 어떤 질감을 가졌는지, 또 어떤 결과를 이끌어내는지는 읽는 사람의 몫. 좀 억지스러운 부분이 없다고는 못하겠지만, 이미 이런 사건들을 추수때 볏짚가리 모아 잡듯 움켜쥐고 소설을 이끌어나간 작가에게 불만을 말하고 싶지는 않다. 

자, 한 번 보자.

1. 어딘가의 공용 화장실에서 기르지도 못할 아이를 낳은 미성년자
2. IMF 이후 마약의 나락으로 떨어져버린 소시민
3. 방화인지 실화일지 모를 지방 농장의 화재와 비극적인 결말
4. 신촌과 대학로, 서울역에서 먹고 사는 가출 청소년
5. 장애 수급자를 인질로 잡아 지원금으로 먹고사는 불량 가족
6. 성을 파는 가출 청소년들, 여자아이들을 사는 중년 남자들
7. 매년 3.1절과 광복절 새벽을 장식하는 폭주족들의 광란의 질주


우리 모두 이미 알고 있었던 것들이 아닌가.

김영하는 그 '모두가 알고 있는 것'을 꼼꼼하게 그러모아, 씨줄과 날줄로 엮어서 스토리를 짜고 거기에 자신의 색을 입혔다. 그래서인지 김영하의 이번 소설은 최근 몇몇 언론이 시도하고 있는 '내러티브 저널리즘'의 확장 증보판으로 읽힌다. 나쁘다는 게 아니다. 오히려 영리하다. 기자들이 놓치고 있는 것을 붙잡아 앞뒤로 늘리고, 위아래로 펼친 것이다. 그리고 그걸 떠받치기 위해 '허구'라는 (역설적이지만) 탄탄한 심지를 박아 넣었다. 이건, 매일 스쳐가는 사회면 구석의 기사들에 집중하고, 이를 단초로 '취재'를 통해 스토리를 짜는 '작가'의 '집요함'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기자도 물론 '집요함'이라면 당당히 명함을 내밀(어야 하)지만, '파헤침' 뒤에 필요한 '통찰'은 작가에 미치지 못한다. 

안그래도 소설에 잠깐 기자 얘기가 나온다. 기자 '집단'에 관한 내용이다. 

언론사의 취재차량들은 보이지 않았다. 그들은 언제나 대폭주가 끝난 다음에나 법석을 떨었다. 매년 똑같은 일이 벌어지는 줄 알면서도 언론사들은 취재인원을 배치하지 않았다. 다음 날 아침, 경찰청에 나간 출입기자들이 경찰로부터 검거 인원과 단속 상황을 브리핑받고 단신으로 처리하면 그만이었다. 광복절 전야에 몇몇 신참기자들이 출입 경찰서 '형님'들의 긴장된 움직임을 데스크에 보고했지만 취재명령은 떨어지지 않았다. 대학생과 시민단체는 쉰 명만 모여도 카메라들이 몰려들었다. 그들은 한 자리에 고정돼 있는데다가 이슈도 중산층이 관심을 가질 법한 것들이었다. 그들은 '그림'이 잘 나오도록 피켓과 촛불을 들고 한 자리에 앉아 구호를 외쳤다. 그러나 폭주족들은 따라잡기도 어려웠을 뿐 아니라 그림도 안됐다. (p.214-215)

 
틀린 말 하나 없다. 

그러고보면 기자들이 가장 듣기 싫어하는 말 가운데 하나는, 자신의 기사를 '소설 썼네'라고 평가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명제를 이제 바꿔야 할 때가 된 것 같다. '기사를 써야 하니까 그렇지, 나도 소설 쓰라고 하면 얼마든지 쓸 수 있다'고 공허하게 외치는 이른바 '내러티브 저널리즘' 시대의 기자들-물론 나를 포함해서-에게, 이 소설이 어떻게 다가갈지 궁금하다. 소설은 기사를 향해 이렇게 공격적으로 다가오는데, 기사는 어디로 가야 하는가. 뭐, 하루 이틀 얘기는 아니지만.










**신간 소개 기사로는 경향신문의 이 기사가 무난하다. 제목은 좀 아닌 것 같지만.
[경향신문] "인간의 괴물성이라는 것이 분출하는 10대들 얘기" (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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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jyoo
2012/03/05 12:15


아침에 J일보를 훑어보다가 눈길이 머문 기사. 27면에 실린 이 기사의 제목은 "72억원짜리 요요마 첼로…장구치듯 두드린 김동원"이다. (링크) 원광디지털대학 전통예술학과 김동원 교수가 참가하고 있는 '실크로드 앙상블'이 오는 12일 서울 예술의전당 무대에 오른다는 기사. 

내용보다는 저 단어 '꾕가리'를 보고 뭔가 이상해서 한참을 봤다. 아무래도 어색했다. 네이버에서 '꾕가리'를 찾아봤는데, 이런 결과.


'꾕가리'에 대한 검색결과가 없습니다.

  • 단어의 철자가 정확한지 확인해 보세요.
  • 한글을 영어로 혹은 영어를 한글로 입력했는지 확인해 보세요.
  • 검색어의 단어 수를 줄이거나, 보다 일반적인 검색어로 다시 검색해 보세요.
  • 두 단어 이상의 검색어인 경우, 띄어쓰기를 확인해 보세요. 네이버랩 자동 띄어쓰기


'꾕가리'는 '꽹과리'의 잘못된 표현이다. 네이버 국어사전에는 이렇게 돼 있다. 
링크는  http://krdic.naver.com/detail.nhn?docid=6408500#FGN1054 

꽹과리

명사

<음악> 풍물놀이와 무악 따위에 사용하는 타악기의 하나놋쇠로 만들어 채로 쳐서소리를 내는 악기로, 보다 작으며 주로 풍물놀이에서 상쇠가 치고 과 함께 굿에도 쓴다[비슷한 말] 동고6()ㆍ소금2()ㆍ4().

관련 규범 해설

‘꽹과리’의 의미로 ‘꽝쇠’를 쓰는 경우가 있으나 ‘꽹과리’만 표준어로 삼고, ‘꽝쇠’는 버린다.

관련조항 : 한글 맞춤법 4장 3절 25항
 

김 교수가 '꽹과리'라고 말한 걸 기자가 '꾕가리'로 잘못 썼을 확률이 높다. 그러면서 기자 본인의 질문인 '장구'는 표준어로, 김 교수의 답변인 '장고'는 틀린 표현으로 썼다. 김 교수는 전문가인 '주제'에 '장구'와 '꽹과리'를 모두 잘못 말한 얼치기 전통예술가가 되어 버린 셈이다. 김 교수의 서면 답변을 그대로 기사화했다면 모르겠지만,  기사 첫머리에 '공연을 앞둔 김 교수를 만났다'고 되어 있으니, 서면 인터뷰는 아닐 것이다. 대체 뭘 어쩌라는 말인가. 김 교수는 해당 기자에게 기사 정정을 요구하시라.


쓰는 김에 하나 더.

3월 3일 토요일판 J일보에 난 기사다. 



기사 제목은 "브로드웨이에서 주목받는 한국계 연극인 제니퍼 림"이다. (링크) 제니퍼 림의 가족적 배경을 설명하면서 '국물 있사옵니다'의 작가 이근삼 선생이 그녀의 '외삼촌 할아버지'라고 소개했다. 외삼촌 할아버지? 제니퍼 림의 외삼촌의 할아버지(외증조부)인가, 할아버지가 된 외삼촌인가? 제니퍼 림의 아버지의 외삼촌인가? 할아버지의 외삼촌인가? 어떤 가족에서는 흔히 쓰는 말일지도 모르겠지만, 얼핏 봐서는 촌수를 도무지 짐작할 수 없는 표현이다. 

역시 네이버에서 검색. 결과는 클릭

설명을 보면 보통 '아버지의 외삼촌', 즉 내 위치에서는 친할머니의 남자 형제를 '외삼촌 할아버지'라고 하나 보다. 그러나 이는 정식 명칭이 아니고, 위에서 보듯 듣는 사람에게 혼란을 줄 수 있다. 

표준대국어사전에 따르면 아버지의 외가는 진외가(陳外家)라고 하고, 위에서 '외삼촌 할아버지'라고 표현한 어른은 '진외종조부', 혹은 '진외할아버지'라고 해야 한다. 물론 '외삼촌 할아버지'가 '진외종조부'나 '진외할아버지'보다는 친숙하게 들리지만, 엄밀히 말해 틀린 표현이다. 

기사 바이라인을 보니 해당 기사는 뉴욕 현지에서 프리랜서 기자가 썼다. 아무리 그렇다고는 해도, J일보는 데스크 안 보는가.  

찾아보니 이런 도표도 있긴 하다.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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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jyo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