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01/10 18:12



9년 전, [비포 선라이즈]의 마지막 장면은 이런 것이었다고 기억한다.

비엔나 중앙역에서 제시와 셀린느가 헤어진 뒤, 하프시코드의 선율이 천천히 흐른다. 카메라는 전날 밤 그들이 함께 했던 공원과 강변, 골목과 다리, 유원지와 술집, 오래된 레코드점과 트램이 지나는 거리를 그들이 지나간 시간의 역순으로 하나 둘 비춰 나간다. 새벽을 맞은 각각의 장소들은 하룻밤의 일들을 조용히 묻고 새로운 하루를 시작한다. 사람들이 천천히 비엔나의 거리를 채우고, 헤어진 제시와 셀린느도 각자의 거리에서 각자의 삶을 채워 갈 것이다. 그들이 다시 만나게 될 지는 알 수 없지만, 그래도 지난 밤은 참으로 아름다웠다....

[비포 선라이즈]를 보고 제시와 셀린느가 다시 만나는 것이 좋은지, 그렇지 않은지를 고민해 보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나는 그들이 6개월 뒤 만나지 않는 게 좋겠다는 쪽이었다. 이유를 묻는 몇몇 지인들에게는 이렇게 얘기했었다.

처음 만날 때부터 곧 헤어질 것을 알고 있었기에 제시와 셀린느는 서로에게 그만큼 솔직하고 진지할 수 있었을 것이다. 약간의 치기와 '오버'도 오히려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생각하는 것이 가능했을 것이다. 다시 만나는 순간, 지난 여름의 흥분과, 낯선 도시의 유혹과, 달콤한 재치와, 두근거리는 감정이 가져오는 행복과 기쁨은 그것으로 끝이다. 만약에 정말 다시 만난다고 하면, 둘이 싸우건, 혹은 섹스를 하건 어느쪽이건 관객인 우리에게는 좋은 구경거리가 되겠지만 제시와 셀린느라는 두 유리알같은 남녀에게는 불행이다. 결국 서로가 서로에게 해 줄 수 있는 것은 서서히 조금씩 실망해 가며 결국에는 서로를 망가뜨리는 일 뿐일 테니까.

지금에 와서 보면, 나는 그때 '절반'만 맞았던 것 같다. 결국 그들은 6개월이 아닌 9년 뒤에 다시 만났기 때문이다.

가만히 내버려 두어도 사람은 누구나 나이를 먹는다. 스물 세 살이던 제시와 셀린느는 서른 두 살이 됐다. 제시는 미간에 흉터처럼 깊게 주름이 패인 베스트셀러 작가가 됐고, 셀린느는 볼살이 쪽 빠진 환경운동가가 됐다. 제시는 대학에서 만난 여자와 결혼해 가장이 됐고, 셀린느는 짧은 사랑을 반복하며 여전히 혼자다.

물론 우연은 아니겠지만, 제시의 출세작은 셀린느와의 만남을 다룬 소설이다. 9년 전의 만남은 제시에게도, 셀린느에게도 깊은 영향을 주었겠지만, 아무래도 배낭여행으로 유럽까지 건너온 제시 쪽의 임팩트가 더 컸을 것이다. 게다가 [비포 선라이즈]의 대화에서도 알 수 있듯이 제시는 현실주의자인 척하는 로맨티스트다. 기억을 채색하고 풀어놓는데는 '선수'인 것이다. 영화 속에서만 존재하는 책이기에 읽을 수는 없었지만 아마도 제시의 책은 영화 속의 '사실'보다는 훨씬 더 미화되고 과장됐을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다. (제시를 탓하는 것이 아니다. 소설이란 그런 측면이 있는 것이 당연하지 않은가.)

9년 전의 비엔나와 이번의 파리. 비엔나는 제시와 셀린느 둘 다 스쳐가는 곳이었다면 파리는 셀린느에게는 일상이다. (그래서 이번엔 제시보다는 셀린느가 주연에 가깝다.) 그래서일까, 셀린느는 더 많이 얘기하고, 더 많이 감정적이다. 제시의 기사 딸린 렌터카 안에서의 셀린느는 가만히 봐 주기가 민망할 정도로 히스테리컬하다. 9년 전의 똑 소리나게 당당하면서도 따뜻하던 셀린느에서 많이 멀어진 듯한 느낌. 그러나 당연히 미워할 수 없다.

화두는 음악이다. [비포 선셋]의 처음부터 마지막 장면에 이르기까지, 음악이 나왔던가? 좀처럼 기억이 나지 않는 것으로 미뤄, 아예 없었거나, 있었어도 전혀 인상적이지 않았던 것 같다. 오래된 레코드샵에서 제시와 셀린느가 들었던 [come here]나 앞서 얘기한 하프시코드 연주곡의 여운이 아직도 남아 있는 [비포 선라이즈]에 비하면 리차드 링클레이터는 이번 영화에서 음악을 지나칠 정도로 절제했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순간, 제시를 집으로 데려온 셀린느가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부른다. 리듬은 가벼운 왈츠, 멜로디도 평온하지만, 내용은 9년 전의 제시를 그리워하는 애절하기 짝이 없는 곡이다. 이 한 곡을 위해서 링클레이터는 영화의 전체에 음악을 부각시키지 않았던 것이다.

노래 때문인지, 아니면 제시가 9년 전과는 다르게 얘기를 많이 하지 않아서인지, 세월은 셀린느에게 더 많이 흐른 것 같다. 그 세월이 모두 고통은 아니었을지라도, 제시를 다시 만난 셀린느는 그때 비엔나에 다시 가지 않은 것을-어쩔 수 없었다지만-이제서야 후회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물론 제시도 약속의 날 비엔나에 나타나지 않은 셀린느를 원망하며 3년이 넘는 시간동안 그 하룻밤을 머리속에서 끊임없이 복기했겠지만, 소설을 탈고하는 순간, 제시의 기억은 그날 밤 있는 그대로의 기억에서 분리돼 '추억'으로 동결됐을 것이다. 그렇기에 제시는 다시 만난 셀린느 앞에서 조금 더 어른이 된 척 할 수 있었을 것이다.

마지막 장면, 재즈 여가수의 흉내를 내며 제시에게 뉴욕행 비행기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상기시키고, 조용히 웃으며 페이드 아웃되는 셀린느의 모습이, 그토록 쓸쓸하게 느껴지는 것은 왜일까. 그러면서도, 끝내 제시와 셀린느가 작별하는 장면을 보여주지 않은 링클레이터의 의도는, [비포 선라이즈]-[비포 선셋]을 잇는 트릴로지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일까, 아니면 순수하게, 마치 [비포 선라이즈]의 마지막처럼 관객에게 모든 가능성을 열어주는 생각의 자리를 마련해 주기 위한 것일까.

나는 이번에는 '다음'을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everything is possible. 어떤 결론을 내리건, 나도 [비포 선라이즈]를 보고 가슴 설레며 나름의 스토리를 만들어 가던 그때의 나로부터 9년을 살아온 것이다. 그리고 나의 풍경 속에서 나의 인생을 채워가야 하는 '의무'가 있는 것이다. 뉴요커 소설가 제시와, 파리지엔느 환경운동가 셀린느처럼 말이다.

(작성 : 200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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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jyo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