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작가 김영하의 [책읽는 시간]이라는 이름의 팟캐스트를 짬짬이 듣는다. 회사와 집이 그리 멀지 않아 빠르지 않은 걸음으로 편도 30분 정도 걸리는데, 출근길에 반 정도를 듣고, 퇴근길에 나머지 반 정도를 들으면 적당하다. 겨울은 겨울이라 바람이 차고 무거워서, 손은 코트 주머니에 푹 찔러넣고, 목도리에 턱 끝을 연신 부비며 귀에 꽂은 이어폰에 온 신경을 집중해서 듣는다. 중간에 안양천을 걸어서 건너는 오목교 구간에서는 눈을 잠시 먼 곳으로 두고 출근길엔 햇빛을, 퇴근길엔 밤하늘을 받아들인다. 귀에서는 조금은 신경질적이면서도 매력적인 김영하 작가의 목소리가, 적당한 속도로 소설을 읽어준다.
오늘도 그랬다. 아침에 집을 나서, 15층에서 1층으로 내려가는 엘리베이터에 오르면서 아이팟의 플레이 버튼을 눌렀다. 김영하의 팟캐스트 가운데에는 가끔 그런 게 있는데, 오늘도 타이틀이 흘러나온 뒤에는 아무런 소개도 인사도 없이 다짜고짜 '본방'이었다. 거리로 나서 본격적인 출근길에 오르면서, 주머니의 아이폰을 꺼내, 장갑을 벗고, 잠금해제를 하고, 누가 쓴 무슨 소설인지 확인할까 망설였지만, 찬바람이 그런 생각을 날려버렸다. 귀찮았다. 일단 아무런 사전정보 없이 귓속으로 흘러들어오는 내용에 빠져보기로 했다.
올 겨울 추위는 유별나다. 눈도 많이 왔다. 스키캠프 간 손자들한테서 걸려온 전화 목소리가 낭랑하다.
'손자'라는 단어가 탁 걸렸다. 손자를 둔 노인이 화자인 소설이다. 노인 화자를 일부러 피하는 건 아니었지만, 이런 시작의 소설이라면 웬만해서는 스스로 찾아 읽지는 못했을 거라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그래도 나는 눈이 무섭다. 친정어머니가 금년처럼 폭설이 내린 해에 눈에서 미끄러져서 엉치뼈가 망가진 후 노인으로는 견디기 어려운 수술을 여러 번 거쳤지만 결국 보행의 자유는 회복하지 못하고 10년 동안이나 집안에 갇혀 지내다가 돌아가셨다. 지금 내 나이가 그 지경을 당하실 때의 어머니 나이와 같다.
게다가, 여성인 노인, 노인인 여성, 즉 '할머니'가 화자다. 김영하의 저음으로 듣는 할머니 화자의 목소리가 처음에는 어색했지만, 듣고 있을수록 이물감은 점점 사라져 마침내 아무렇지도 않게 되었다. 생각해보면 여성 화자의 책(팟캐스트로 듣는 '낭독'이 아니라)을 읽을 때 내 머릿속에서 일어나는 일과 비슷한 과정이다.
그렇게 출근길에, 그리고 퇴근길에 나는 내가 기억하는 한 거의 처음으로 '할머니 화자'의 소설을 읽었다(아니 들었다).
개성이 고향인 어느 사촌 자매의 이야기다. 공부를 잘해 살림이라고는 도통 모르고 자라, 대체로 유복한 가정에 시집을 가서 평생을 '지키고' 지낸 탓에 '진 일'과는 거리가 멀어져버린 다소 쌀쌀한 사촌언니와, 어릴 적부터 장녀로 어머니를 도와 살림을 척척 하다가 어린 나이에 열살 차이도 더 나는 유부남과 정분이 나 끝내 살림을 차린 뒤, 착하지만 경제적 능력은 없는 남편과 함께 사느라 신산한 노년을 보내고 있는 사촌동생이 나온다. 서로 바쁘게 자식 키우며 살 땐 격조하던 자매가, 각각 3년 차이로 남편들을 먼저 보낸 뒤 다시 가까워져 동생이 언니 집에와서 부엌일이며 살림을 도와주고, 언니는 파출부 구하느니 그 돈으로 동생 용돈 줘 가며 지낸다. 언니는 언니라는 가족적 위치와, 용돈이며 먹을 것들을 챙겨준다는 경제적 위치로 인해 동생에게 늘 윗사람 행세를 하려 하지만, 사실 동생의 처지를 걱정하고, 제 살기 바빠 동생을 챙겨주지 못하는 동생의 자식들을 원망한다. 동생은 조금 철부지다. 어디가서 공밥을 얻어먹는 걸 싫어해 몸놀림이 재고, 음식솜씨도 옛날이라면 궁중 숙수를 했을 만큼 좋지만, 남편이 죽기 전날 밤 자기 손을 꼭 붙잡고 '사랑해'라고 말했다는 걸 여기저기 흘리고 다니면서 인정받으려 한다.
그러던 차에, 사람좋은 사촌동생은 아는 사람이 남해의 섬에서 운영하는 민박집을 도우러 간다. 사실 죽은 남편이랑 살던 옥탑방의 찌는듯한 더위를 견디지 못해 피신한 것이다. 피신은 피신이지만 그 민박집에서도 인심좋게 먹이고 쉬게 하려는 목적으로 동생을 부르지 않았을 거라고, 바쁜 성수기에 일손이 부족해 부려먹으려고 불렀을 거라고 언니는 생각한다. 그 짐작이 완전히 틀리지는 않았지만, 동생은 거기서 새로운 사랑을 만난다. 언니는 깜짝 놀라고, 부러움인지 질투인지 걱정인지 모를 복잡한 감정에 휘말린다.
동생에 대한 감정과, 동생이 묘사한 섬 생활과, 아직 본 적도 없는 새 제부-70이 넘은 어부-의 캐릭터가 얽히다가 소설은 결말을 맞는다. '분홍빛 도미'로 상징되는 결말은, 결코 절망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앞길 창창한 희망도 아니다. 화자는 나름 재취에 성공한 것으로 보이는 동생에 대해 이제는 걱정은 덜 하겠지만, 그렇다고 마음 푹 놓고 잊어버릴만큼 안심하는 상황도 아니다. '분홍빛 도미'가 상징하는 그 감정은 다름아닌 그리움이다. 소설은 이렇게 끝난다.
그립다는 느낌은 축복이다. 그동안 아무것도 그리워하지 않았다. 그릴 것 없이 살았으므로, 내 마음이 얼마나 메말랐는지도 느끼지 못했다. 우리 아이들은 내년 여름에 이모님이 시집간 섬으로 피서를 가자고 지금부터 벼르지만, 나는 안 가고 싶다. 나의 그리움을 위해. 그 대신 택배로, 동생이 분홍빛 도미를 부쳐올 날을 기다리고 있겠다.
퇴근하기 직전, 팟캐스트를 다시 켜면서 뒤늦게 확인한 이 소설은 고 박완서 선생의 <그리움을 위하여>다.
나는, 이렇게 올올이 정교하고 다채롭게 펼쳐진 '수다'를 처음 접했다. 어르신들은 흔히 '내 이야기를 쓰면 소설책 몇 권도 더 될거야.'라는 말씀을 하신다. 이 이야기는 몇 번이고 반복해서 그렇게 말하는 것에 지치거나, 에이 설마 하면서 주변에서 믿어주지 않음에 화난 어르신이, '그러니까, 내 이야기는 이런 얘기라고. 들어나 봐.'하면서 진짜로 팔을 걷어붙이고 쓴, 그런 이야기같다.
소설을 듣는 내내, 나는 부모님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 내년이면 이제 환갑이지만 여전히 내게는 그닥 나이든 걸로 보이지 않는 어머니와, 소설속 '동생'처럼 일 잘하고 음식솜씨 좋은 막내이모가 떠올랐다. 당신들이 살아온 인생 속에서 굴리고, 말하고, 전하고, 숨기던 생각들이 어쩌면 이런 느낌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머니나 막내이모가 이 소설을 읽을 기회가 있을까. 만약 읽는다면, 당신들은 이 소설을 어떻게 받아들일까.
김영하는 올해 1월 박완서 선생의 타계 소식을 듣고 이 팟캐스트를 녹음했다고 한다. 그의 블로그에 가서 조금 찾아보니 이렇게 나온다.
박완서 선생님이 22일 오전 향년 8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서가에서 그분이 쓰신 글을 뒤적이다가 그대로 마이크를 연결해 소리내어 읽었습니다.
작가는 자신이 쓴 책에 묻힙니다. 비통한 마음으로 독자들은 영혼의 장지를 배회합니다. 치유는 그렇게 시작되지요. 작가란 그런 존재입니다. 죽어도 죽지 않는. 자신이 쓴 언어 속에서 살아갑니다.
김영하는 팟캐스트에서, 소설을 다 읽은 뒤 박완서 선생과의 추억을 얘기했다. 고령에도 소녀같은 감성을 갖고 계셨던 선생은 문단의 젊은 작가들, 특히 남자 작가들과 유쾌하고 즐거운 일화들을 많이 만드셨다고 했다. 소주와 이야기를 좋아했다고도 했다. 그러다가 '아...' '음...'을 반복하더니, 급하게 녹음을 마무리했다. 왜 그랬는지, 물을 길은 없지만, 굳이 묻지 않아도 알겠다.
이제 다음달이면 고인의 1주기가 된다. 아직도 비통한 마음으로 '영혼의 장지를 배회'하는 독자들이 많을 것이다. 나는 그 가운데에서도 아주 많이, 늦었다.
부끄럽지만 이제야 처음으로 고인의 작품을 접하고, 다시금 옷깃을 여미고 고인의 명복을 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