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08/30 14:11
8월 말 작성. 10월 5일 revise.




뭐, 거창하게 일본 정치를 예측하고자 하는 건 아니고, 그렇다고 거대문화담론을 건드리려는 것도 아니고, 그저 3.11 동일본대지진 이후 이제 곧 7개월을 앞둔 마당에 일본은 앞으로 어떻게 변해갈지가 궁금하다.

읽어보면 알겠지만 아주 잡스러운 것들이 대부분일테고, 복잡한 상황을 내맘대로 해석하는 오류도 가득할 것. 그러니 혹시라도 번쩍이는 통찰과 묵시록적인 예언을 기대하셨다면 패스하시길. 

다른 자리에서 몇 번 입에 올린 적이 있는 얘기인데다, 현지 취재 직후 취재파일(링크)로도 쓴 얘기지만, 동일본 대지진이 일어난 이후, 내가 가장 먼저 떠올린 건  오에 겐자부로의 소설 [치료탑·치료탑 혹성] 연작이었다. 내용은 이런 것이다.

환경오염으로 더이상 기존의 고도성장을 계속할 수 없게 된 인류는 종족의 생존을 위해 지구를 버리기로 결심하고, 전세계의 모든 자원과 기술을 한 데 모아 대탈출을 감행한다. 우주의 한 행성을 제2의 지구로 삼기로 결정하고, 선택받은 인류 '대표'가 떠나고 난 지구에서 남은 사람들은 지금까지와는 다른 삶의 방식을 모색해 나간다. 보다 소박하고, 자율적이고, 고요한 삶에 '2등 인류'가 익숙해질 무렵, 그들을 지구에 남겨놓고 떠나갔던 인류 대표들이 다시 지구로 돌아오는데...



무슨 공포 SF물같은 요약이지만 연작 소설의 내용 전체가 중요한 건 아니고, 동일본 대지진 이후와 어느정도 맞닿아 있지 않을까 하고 내가 생각했던 부분은 소설 속에서 '2등 인류'가 선택했던 삶의 방식이다. 주창자인 야나기타 시게의 이름을 따서 'YS 시스템'으로 불리는 이 방식은 다음으로 요약된다.


<고도한 것은, 보다 고도하지 않은 방향으로>
<어려운 것은 보다 쉬운 방향으로>
<복잡한 것은 단순한 방향으로>
<불필요한 설비나 장식이 붙어있는 것은, 평범하게>
<세련은 적(敵)>
<목표는 원시적인 유용성>
<장래 희망은 소규모 수공업으로 분산화하는 것>

소설 속에서 인류가 '떠난 자와 남은 자'로 나뉘게 된 것은 생존을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지구에 남은 '2등 인류'는 한정된 공간과 자원 속에서 스스로의 생존을 담보하기 위해 '심플 라이프'를 택한다. 동일본대지진 이후 일본사회의 변화를 밖에서 지켜보고 있으려니, 소설처럼 극단적이지는 않더라도 이런 '심플 라이프'를 향한 움직임이 생기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현재 일본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이런 움직임은, 불행히도 인류 전체의 생존을 위한 낭만적인 시대정신으로 보기는 어렵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몇 가지 키워드로 생각을 정리했다.

<절약·절전>
후쿠시마 원전사태가 직접적으로 불러들인 현상은 '절전'이다. 멀쩡히 잘 돌아가던 원자로가 삽시간에 가동이 중단됐으니 당장 써야 할 가용전력이 부족한 것. 초기 제한송전, 지역별 순번 정전단계는 벗어난 듯 하지만, 사회 전반에 '절전'은 여전히 큰 화두로 자리잡고 있다. 어쩌면 '절(節)'자는 올해의 한자로 등극할 수도 있으리라. 전기가 부족하면 생산도 뒤처질테니, 절약은 자연스럽게 따라온다. 어쩔 수 없는 절전·절약의 강요에 사람들은 점점 지쳐간다. 자연재해로 인한 것이니 누구를 탓할 수도 없는 답답함이 스물스물 분노를 키우고, 그 분노는 결국 적당한 출구를 찾아 분출할 기회만을 노리게 될 것이다. 가장 가능성이 높은 것은 정치적 불신, 나아가 불복종이 아닐까.

<여행의 증가>
단기와 장기, 국내와 국외를 막론하고 여행이 늘어난다. 여행은 잠시나마 피폭을 피할 수 있는 단기적 대안인 동시에 지진해일 이후 침체된 지역사회를 능동적으로 벗어나기 위한 효율적인 기분전환 방안으로 여러 계층에서 폭넓게 받아들여진다. 돈이 많은 사람들은 가능하면 일본에서 멀리, 가능하면 편서풍과 해류의 영향이 적을 것으로 생각되는 호주나 뉴질랜드 등 남반구 지역, 혹은 미국 동부쪽으로 장기 여행(혹은 체류)을 떠난다. 중산층은 비교적 사회가 안정적인 유럽이나, 적은 돈으로도 휴식과 요양을 만끽할 수 있는 동남아를 선호할 가능성도 있다. 장기·장거리 해외여행이 어려운 계층은 가까운 한국, 중국으로 잦은 여행을 떠나거나, 규슈, 오키나와 등지로 국내 여행을 하기도 한다. 동일본대지진 이후에도 계속되는 엔고 현상이 공항으로 향하는 이들의 발길을 재촉한다. 

<서브컬쳐의 심화>
대지진과 원전 사태 전에도 일본의 서브컬쳐는 콘텐츠의 양과 깊이 측면에서 이미 세계 최고 수준이었다. 지진해일로 수만 명이 숨지고, 해일이 물러간 이후에도 몇 달째 방사능 피폭의 위험이 상존하는 지금같은 상황에서는 현실을 도피하고자 하는 욕구는 더욱 커질 수도 있다고 본다. 신문/방송 등 주류 콘텐츠는 계속 '비상시국'을 외치고, 이에 따른 피로감도 더해 간다. 그래서, 이른바 오타쿠 문화가 더욱 안으로 깊이 뿌리를 내려, 현실의 팍팍함을 잊으려하는 사람들에게 자발적인 세계관으로 자리잡을지도 모르겠다. 지금쯤 일본에서 생산되는 서브컬쳐에 대한 분석이 필요한 부분이다. 과연 누가, 무엇을 만들고, 누가 이것을 소비하는지 말이다. 

<극우파의 득세>
동일본대지진 같은 거대한 자연재해를 '함께' 경험한 일본 사람들은, 대체로 평온한 다른 국가, 다른 민족에 비해 동료의식을 더 크게 느끼지 않을까? 동료의식은 '왜 우리만 이렇게 당해야 하나'라는 억울함과 맞물려 극우세력을 키우는 자양분이 된다. 마침 민주당이 정권을 잡았을 때 동일본대지진이 발생했고, 민주당 정권은 사태 해결과 대안 제시에 우왕좌왕하는 실망스러운 모습을 보여줬다. 물리적인 폐허를, 정신적인 쇼크를 보상할 대상을 찾는 사람들은 내적으로 단결해 대안을 찾게 된다. 영토분쟁에서 완고한 자세를 유지하고, 자국 문화를 잠식하는 외부 세력에 대해 지극히 배타적인 입장을 취한다. 이런 가운데 독도와 댜오위타이는 여전히 분쟁중이고, 도쿄 도심에서 '한류' 반대시위가 거칠게 일어난다. 야스쿠니 참배에 찬성하고 망언을 한 전력이 있는 정치인이 수상에 오른 것은, 집권 민주당도 이런 분위기를 그냥 보아 넘기기는 어렵겠다고 판단한 일종의 정치적 '타협'의 산물로 해석될 수도 있을 것이다. 

<도쿄 포기>
10월 5일 오전에 나온 아래 트윗을 보자. 

Radiation_Ages약 17분 전





일본 '위기관리도시추진연맹' 의원들 '부수도 정비' 입법제출 방침 - 한마디로 도쿄포기 '수도천도'. 모건스탠리가 33억달러 도쿄부동산 포기하고 방사능피해 도망친게 4월달http://blog.daum.net/soph07/12815191

부수도 정비 얘기는 사실 오래전부터 있었던 건데, 쓰나미 직후부터 다시 거세게 터져나오고 있다. 과연 에반게리온의 '제3신도쿄시'가 현실화되는가...설마했던 수도권 피폭이 기정사실화되고 있고, 하반기 들어 수도권의 피폭 상황에 대한 정보들이 봇물 터지듯 쏟아져 나오고 있다. 이제 정부가 정해놓은 기준치따위, 아무도 믿지 않는 듯. 지진의 위험이야 어차피 상존하는 것이었으니 이제 남은 건 가능한 한 피폭지역에서 멀리 떨어지는 것이다. 그냥 사람만 옮기는 게 아니라, 사람들의 생활공간을 통째로 옮기는 것, 즉 수도 이전에 대한 강력한 요구가 터져나올 것이다.그러나 현재의 약한 기준치를 정부가 고수한다면, 천도 움직임에 대응하는 것 자체가 정부로서는 상당한 부담으로 작용할 수도 있다. 계속 별 문제 없다는 입장인데, 어찌 수도를 옮기자는 말에 동의할 수 있겠는가. 의원들이 제출할 '부수도 정비' 입법안이 어떤 내용인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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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jyoo